달콤한 살인 계획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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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장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가 누군지 하는 요소는 작품의 재미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합니다. 프레데릭 브라운의 <The murderers>라든가, 크리스티 여사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또 ABC 살인사건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김서진 작가님의 이 작품은 이른바 경계선지능을 지닌 어떤 여성의 살인 완수를 위한 분투기(?)인데...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살인이라는 극한의 범죄,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최악의 악행을 꿈꾸는 화자(예비 범죄자)를, 미스터리 독자들은 간혹 응원하게도 됩니다. 시드니 셸던의 <내일이 오면(1980년대말에 MBC에서 원미경씨 주연 드라마로도 각색했었습니다)> 같은 걸 보면 젊고 아름다운 여성 주인공은 자기 인생을 망쳐 놓은 남자에 대해 복수를 꿈꾸는데, 이런 경우는 어느 정도 정당화의 근거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악당이 계획, 실행하는 범죄마저 독자들이 은근 그 완수를 격려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캐치 미 이프...> 같은 게 대표적인 예겠는데, 주인공 버프라는 게 그만큼이나 큽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피해자인데다가, 지능도 떨어지고(그렇게 태어난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p25), 살해의 타겟이 아주 나쁜 녀석(주인공의 말에 의하면 일단 그렇습니다)이기까지 하니 당연 독자들의 동정을 받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그 특정 가해자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사회적 약자인 그녀를 돌아가면서("나라고 빠질 수 없지"라는 듯) 착취한다는 건데, 독자는 이 대목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소설, 영화 <도가니>를 보듯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운전을 할 줄 안다는 게 신기한데, 그 폭력적인 남편이 강요를 해서입니다. 

p17, p25에 나오듯 남홍진은 절에서 20년 가까이 밥 짓는 기계로 일했습니다. 가뜩이나 나쁜 머리로 태어났는데 그런 기계적 생활에 길들여졌으니 생각이라는 걸 하는 법을 잊을 만도 합니다. 그래서 남홍진은 작품 전체을 통해 끝없이 되뇝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이 호흡처럼 습관이 된 사람한테는 어떻게 사람이 한 순간이라도 생각을 잊을 수가 있을까 싶어도 세상에는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p105에 나오듯 외모상으로도 봐 줄 것 하나 없는 그녀는 대형 전기밥솥 같은 취급을 받았을 뿐입니다. 

p120 이하에서도 알 수 있듯 서화인은 진중하고 유능하며 성실한 형사가 틀림없습니다(p38에서, 시청 직원이자 그의 연인인 오정미의 평가로는 "약간 둔한 아저씨"라고도 합니다). 이천식 목사를 만나러 가서 한 청년과 우연히 이야기하는데 뜻밖에도 목사의 아들 이동현입니다. 18년 전에 자살한 중학생(p87) 서현의 오빠이기도 한데, 아이들 이름이 하필이면 동현, 서현이라서 재미있기도 합니다. 물론 둘 다 한국에서는 최고로 흔한 이름이고, 동현이는 모를까 서현의 경우에는 서녘 서(西)가 이름자로 잘 쓰이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의미가 들어간 건 아니겠습니다(뒤의 p253 참조. "현"자 돌림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남홍진은 일종의 맥거핀이고 진주인공은 이 서화인이라는 생각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들었습니다. 

p146에 나오듯 이런 경계선 지능의 주인공 남홍진이라고 해도 일단 확실한 동기가 생기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저도 이런 사람을 눈앞에서 만나본 적 있는데, 그 한심하고 시커먼 속셈이 빤히 보이건만 거짓말이 부끄러움도 없이 술술 나오는 걸 보고 경악한 적 있습니다. 참...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죄의식이라는 게 있을 만도 한데... 당대에 죗값을 받는다고 그래서 손자가 그모양그꼴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피해의식 가득한 인생은 자신이 가해자인 줄도 모르고 엉뚱한 사람 하나를 가해자로 망상 속에 세팅하고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남홍진이 계속 이지하를 죽이려 드는 건, 이미 죽은 소명(얘가 서현입니다)이 홍진에게 자신의 살해자가 이지하라고 자꾸 속삭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죽은 소명의 혼(그런 게 있다고 쳐도. p269)은 애초에 홍진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한참 뒤, p225 쯤 돼서야 그 "근거"가 나옵니다). 그런데 p180 이하에 중요한 단서가 하나 드러나네요. 소명은 원래 성씨가 강이었고, 목사는 우리가 앞서 봤듯 이씨였기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얘가 입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이 설령 이지하가 아니라도, 뭔가 억울한 죽음이었기에 혼이 자꾸 꿈에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서화인을 자꾸 괴롭히는 불길한 예감의 근원은 (이유 없이 증거로 조작된 손톱 말고도) 무엇이겠습니까. 나쁜 놈(여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은 반드시 그 죗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는 존재이며, 잘못된 믿음이 흔들릴 때 더 그에 집착한다(p257, p307, p332)." 이 말은 이 목사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한 말이지만, 저는 김서진 작가가 미스터리 독자들을 향해 비판하는 걸로 들었습니다. 왜냐면, 소설 중반쯤에 이르러 이런저런 진상들이 드러났을 때, 아 그렇겠군, 이 작품은 이렇게 마무리되겠군, 타성에 젖은 독자가 성급한 결론을 내리려 들 때 작품은 기발한 반전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만에 기막힌 토종 걸작 한 편 읽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등장인물들도 낭비되지 않고 요모조모로 할 일 다 하고 들어가는 꼼꼼한 구성입니다. 전 처음부터 왜 oooo하고 그분이 서로 o이 같은지가 좀 이상하게 다가왔는데 역시(!) 결말에 가서 일종의 복선인 게 드러나, 저 자신의 빼어난 촉에 자가발전 감탄하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네요 ㅋㅋ 마지막에 ooo과 ooo가 낡은 가게 지하를 빠져나오는 장면도 실제 답사라도 하신 듯 그 묘사가 박진감 넘치고 생생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지만 범인은 역시 ooo가 맞습니다. 이 세끼 아주 악질이죠.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지어내고 말입니다(악질이지만 그럴 만한 동기는 있었습니다). 악당은 본래 죄 없는 사람한테 너도 나와 다를 바 없다며 희한한 물귀신 세뇌를 하려 듭니다. 이런 독특한 빌런을 만들어낸 것도 김작가님의 대단한 재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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