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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2 ㅣ 조선 천재 3부작 3
한승원 지음 / 열림원 / 2024년 11월
평점 :
1권에서 청년 이벽은 적대하던 이가환과 대화하며 "군자는 빈천에 임하면 빈천하게 살고, 오랑캐 안에 끼면 오랑캐로 살며, 더러운 데에 들면 더럽게 살다가, 부귀에 재하여 또 부귀하게 산다(1권 p114)."고 달관한 경지를 논했습니다. 또, 다산은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어 늙은 이방의 간악한 수작(1권 p133)에 의연하게 대응하던 대목도 있었죠.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2권에서 다산은 강진(2권 p46)으로 유배온 후, 놀랍게도 현지의 민초들이 자신을 마치 역병 보듯 피하는 걸 예리하게 깨닫습니다. 이 양반이 천주학쟁이라서 이 먼 곳까지 정배되었는데, 천주학쟁이와 엮이면 3대가 망한다는 걸 조정의 지독한 박해 덕에 백성들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평생 목민관으로서 농민들의 삷을 걱정했던 이런 암담한 현실 앞에 다산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다산은 의연합니다. 신념과 올바른 지식으로 무장핱 영혼만이 보일 수 있는 저력입니다.
2권 p61을 보면 다산이 승지 벼슬을 지낸 줄은 아는 이방이 찾아와 색다른 부탁을 합니다. 아전 신분이라 해도, 글을 알아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확신하기에 이 귀인이 자기 아들의 글눈을 틔워 주었으면 하는 용건이었는데 1권의 그 간악한 자와 일단 대조되는 태도입니다. 하방(下方)하여 모진 고생을 했던 덩샤오핑이 결국 그땅에서도 현지인들에게 존경받았듯, 다산 역시 강진 땅에서 공맹의 도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세상의 바른 이치를 깨닫는 작은 초석을 놓는 데서 보람을 찾습니다.
서울 노론 세도가들이 꽉 장악한 고을 수령직 하나하나에 바르지 못한 벼슬아치들이 들어서서 직권 남용이라도 한다면 다산은 또 한 번 곤욕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다산의 인격에 감복한 강진 주민들은 행여 선생의 신상에 어떤 해악이나 닥칠까 전전긍긍합니다. 돈으로 직을 샀는지 <맹자>의 구절도 모르는 무식한 현감 탓에 다산은 중벌을 받을 위기일발 상황에 처했으나 이 지역 병마절도사의 혜안 덕에 간신히 방면됩니다. 공연히 "무식한 무장 앞에 물고(物故)나 나지 않을지"를 겁내었던 다산도 다소 경솔했던 자신을 다시 돌아봅니다. 스승을 역모로 거의 몬 셈이었던 손가 애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맹자>의 특정 구절은 예로부터 매우 민감한 정치적 파장을 낳았던 전력도 있었기에 까딱 잘못했으면 불귀의 객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말입니다.
"여자의 몸은 남자보다 우주의 율동에 더욱 민감하다(p124)." 그러게나 말입니다. 관계의 열락도 그 궁극의 단계를 더 절실히 느끼는 쪽은 여성입니다. 예로부터 동아시아에서 격물치지의 현인들이 陰陽, 雌雄, 요철, 빈모 등 특정 어휘에서만은 여성상당어를 먼저 배치한 건 다른 각별한 뜻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퇴계나 화담도 방사에서 그렇게나 절륜한 실력을 보였다는 민간전승이 있듯(믿거나말거나입니다), 소설 속의 다산도 운우의 지극한 보람과 희열에 대해 객관적 관념론의 충실한 학인(學人)답게 결코 논외의 경멸감으로 일관하지 않고 겸허한 태도를 취합니다.
p164에서 젊은 승려 혜장과 함께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다산의 모습은 마치 이때로부터 300여년 전 금강산에서 19세의 나이에 산사의 老僧과 논쟁하여 이긴 율곡 이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老幼의 배치가 정반대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다산은 다만 교조적 논리로 혜장을 압박하여 진영의 명예를 높이려는 공명심 따위야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조선 유학의 본진인 노론으로부터 배척, 타매, 축출된 상태이며 사상과 학문의 고향 격인 남인 무리들은 구심을 잃고 흩어졌습니다. 이런 판에 불도자 청년 하나를 윽박지르거나 기를 꺾어 얻는 게 무엇이겠으며 그가 지금 추구하는 실학(實學)의 도가 윤택해질 바가 어디 있겠습니까. 파계승 초의(p220)와도 그는 신분, 나이를 초월하여 격의없는 교분을 나눕니다.
p232 이하에서 다산은 구강포 인근을 지나다가 완전범죄로 묻힐 뻔한 살인범죄 하나를 적발하고 고을 형방에게 넘기기도 합니다. 여인의 곡소리에 진정한 슬픔이 전혀 서리지 않았음을 날카롭게 꿰뚫어본 데서 시작한 그의 간단한 수사 기법은 마치 셜록 홈즈의 재주를 방불케 합니다. 텅 비어야 할 나폴레옹의 흉상 안 공간에 무엇이 숨겨져 있었듯, 어느 조선 남자 시신의 상투 안에도 끔찍한 것이 박혔던 걸 아무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p305에서 이미 망인이 된 다산의 혼은 천계에서 젊을 때의 벗이던 이벽을 다시 만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의미해진 저승의 객이 된 다산은 이제 그토록 궁금해하던 세상사의 모든 답을 알고 석가세존처럼 깨달은 정신으로 승화하는데, 부디 저 위에서 우리 불쌍한 후손들을 계속 굽어보시어 행여 멸망의 길, 악의 유혹에 접어들지 않게 그 애민정신을 발휘하시어 조국을 보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