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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24년 10월
평점 :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한강 작가님의 부친이신 한승원 선생의 대표작입니다. 사실 한승원 선생의 향토적 미학이라든가 한국적 혼(魂) 그 근원의 탐구, 나아가 보편적 휴머니즘의 끈질긴 모색 등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은 이 장편 말고도 여러 걸작들이 있으며, 다만 다른 소설들보다 이 장편이 임권택 감독의 각색영화 덕분에 대중적으로는 더 잘 알려졌습니다. 이 작품만 읽어 봐도 선생이 달성한 문학적 성취의 가치라든가, 그 주제의식이 얼마나 깊이 있고 광범위한 시야를 지녔는지를 알 수 있으며, 마치 귄터 그라스와 토마스 만의 장점만 합친 듯한 공력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어쩌면, 따님이신 한강님보다 선생께서 노벨상 수상에는 더 적합한 작가 경력, 스타일이 아닐지 감히 독단적인 생각도 떠올려 봅니다. 잘 읽히는 소설 본연의 재미 면에서도 더 뛰어나기도 하고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문이당에서 2024년 개정판으로 펴낸 이 책은 소설 외적인 흥미도 끕니다. 일단 문이당이 워낙 오래된 출판사이다 보니 과거 한국 문단의 거물들(이문구 선생이라든가)이 쓴 명작들 판권을 많이 갖고 있으며, 이 소설도 그 중 하나입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른바 "비구니 파동"이라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미 거의 완성된 영화였으나 승려들과 불교계를 비방했다 하여 격렬한 상영반대 운동이 일어났었습니다. 결국 영화는 공개되지 못했는데, 그 <비구니>는 원작 소설이 따로 있었던 건 아니고 이 한승원 선생이 각본 기초를 잡은 역할이었습니다. 이 책 p6 "초판 작가의 말"에 그 점이 작가님 본인의 입으로 진술됩니다.
결국은 상호 소통이 안 되어 오해가 눈덩이처럼 커져 그 소동이 벌어졌던 건데, <비구니>의 확대 개작이라 할, 강수연 등 주연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1989년에 성공적으로 개봉, 흥행함에 따라 이 파동은 건설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판 작가 서문을 보면 당시로부터 4년 정도 후(1985)에도 여전히 선생이 이 일로 마음 고생을 크게 했음을 우리 독자들이 엿볼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며 이른바 10.27 법난이 발생했던 사실도 당시 불교계가 예민하게 나섰던 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초반은 진성(眞成)이라는 법명의 비구니, 강수남의 사연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드리 헵번 주연의 1959년작 영화 <수녀 이야기>도 저는 잠시 생각났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도 부유한 태생이며 타고난 두뇌가 총명하여 공학, 의학 등 어떤 학문 분야에 몸담았어도 성공했을 만한 재원이었으나, 뜻한 바 있어 세속과 연을 끊고 종신순결을 서원하죠. 강수남은 자신을 연모하던 병약한 소년의 연서를 받으나 그 자신도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영혼이었는데 이런 문제 앞에서 갈팡질팡 당황하는 게 당연합니다. 결국 소년은 어린 나이에 죽고 마는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수남은 세상사 일체가 덧없음을 깨닫습니다. 약사가 되어 여성 엘리트로서 좋은 배필을 만나 멋진 한 세상을 살게 하기 위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각오였던 그 양친이, 딸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는데 왜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젊은 남성이 일찍 죽는 설정 은 한수산의 <아프리카여 안녕>이 살짝 떠올려지기도 했는데 이때는 위생,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이런 일이 잦았나 봅니다. "돈 있어야 중질도 괄시를 덜 받는다(p69)."는 수남 부친의 대사도 <수녀 이야기>에 그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소설의 진주인공이라 할 순녀 이야기가 p77 이하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이미 소설 극초반에도 진성, 은선 스님들의 각별한 관심을 받던 행자이며, 묘하게 그 외모부터가 수도생활과의 이질감을 형성하는, 사연 많아 보이는 분위기였습니다. 현종 선생은 순녀에게 참 많은 것을 간접, 직접으로 가르칩니다. 생식과 그 열락의 이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성은 방사의 예사로운 과정도 마치 남성이 여성에게 강제로 못된 짓이나 하는 양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현종 선생이 의도적으로 이 장면을 노출한 건 아니겠으나 뭐 모를 일이긴 합니다). 그런가하면 p114에서 백제멸망 당시 삼천궁녀 투신 설화의 허상을 냉철하게 지적하는 등(지금에서야 뭐 상식이긴 합니다만) 범상치않은 통찰력을 보이기도 합니다. 한승원 작가님 특유의 "저항하는 민초"에 대한 끈끈한 애정은 p117의 전봉준 장군 관련 언급(특이하게도 순녀의 시선에서입니다)에서도 드러납니다. 이 "여승과 도화살" 대목은 에로티시즘과 역사의식이 공히 잘 표현된다는 이유에서 한승원 문학 개성이 압축적으로 빚어진 명장면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는 진영미씨가 연기한 진성스님은 소설에서도 꽤 비중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p156 같은 곳을 보면 우종남이 끝까지 강수남을 찾아와, 그 부모님이 아직도 따님을 기다린다며 집요한 설득을 합니다. 갈데없는 이들(예컨대 고아 처지라든가)이야 산사에서 고된 수행을 할 때 한 번쯤은 자신도 가족이 있어 날 좀 데려가 줬으면 싶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이미 세속 절연에의 심지가 확고한 진성 스님에게야 이런 만남이 늦가을 모기의 앵앵거림처럼 성가실 뿐입니다. 세상사가 이래서, 불공평하기에 되레 공평하다고들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현대사는 동족 상잔의 비극이 남긴 상처가 아직도 깊고 가득합니다. p192 같은 곳을 보면 낮에는 국군과 청년단 사람들이 와서 난리를 치고, 밤에는 빨치산이 패악을 부렸다던 당시의 시대상이 잘 서술됩니다. 사이에 끼여 죽어나는 건 아무 잘못도 없는 백성들뿐입니다. 대체 사람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게 정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까? "할머니는 큰딸의 몸에서 남자의 냄새를 맡았다.(p198)" 당시 몸 간수를 잘 못 한 건 무조건 여자의 탓이라 해서 이처럼이나 고된 봉욕을 그 일가로부터도 치러야만 했던 시대상이었습니다. 소설 저 앞에도 수학여행을 갔던 수남이 갑자기 사라져서 선생들이 여자애가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욕이라도 본 줄 알았다며 걱정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시대상이 이러했습니다.
"깨달음의 진주는 그걸 얻기 위해 억지로 뼈를 깎는 고행을 한다 해서 되는 게 아니며, 얻어진다 해도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p280)" 작가 서문에도 이 비슷한 말이, "해탈은 대승(大乘)에서 사부대중과 함께 오욕을 같이하고 뒹구는 와중에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의외로(?) 석가모니 본인도 인위적인 고행(苦行)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남 보란 듯이 큰 목소리로 회개하는 시늉을 위선자들의 사기, 회칠한 무덤이라면서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특히 선생의 이 작품에 비교적 잦은 성애 묘사가 등장하는 것도, 이승이라는 똥밭에서 열심히 굴러 본 자가 진정 업(業)의 사슬을 끊을 자격이 있다는 심오한 주제와 관련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