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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 - 나로 살아갈 용기를 주는 울프의 편지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신현 옮김 / 북다 / 2024년 9월
평점 :
기법이나 사조, 유파로서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뜸 난해하다, 난삽하다 같은 선입견을 발동하며 지레 멀리하려 듭니다. 그러나 조이스의 작품은 잠시 논외로 하고라도, 얘기가 버지니아 울프의 경우라면 그녀 고유의 촉촉한 스타일, 절실한 말투 덕분에라도 그리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편이죠. 영문학과 불문학에 두루 능한 박신현 선생의 이 편역본만 보더라도, 작가의 한없이 다정다감한 심성과 감수성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기에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를 한결 더 친숙히 받아들이고 교감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책은 그녀가 남긴 여러 서신을 편집한 내용입니다. 작품과 서신은 물론 장르가 다르며 아무리 광의의 문학에 서신이 포함된다 해도 편지의 일차 목적이 (특정 상대방을 향한) 의사의 사실적 전달에 있기 때문에, 서간문의 표현양식이 소설에서처럼 난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편지는 여전히 그 작가의 육성을 담았으며, 당시는 현대처럼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로 소통하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작가의 인격적 진면목을 향한 중요 단서를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이 편지들을 통해 우리 독자들도, 버지니아 울프가 구사한 언어 체계의 키를 슬쩍 수집할 수 있고, 인간적 친밀감도 흠뻑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 명의 위대한 작가를 낳기 위해, 주변에 얼마나 많은 능력자들이 포진하여 그(그녀)를 도와야 하는지도 실감됩니다. 작가들은 때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통속적 의미에서의 생활 감각이 떨어질 수 있기에, 엄연히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도서 시장에서 성공한다거나 그 성공의 과실을 자신의 것으로 챙기는 데에 서투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버지니아 울프의 편지들을 보면, 편집자나 출판사대표야말로 그(그녀)의 첫째가는 팬이어야 하며, 동시에 작가의 내면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통찰을 갖추어야 함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자층의 기호와 트렌드에도 신경써야 하니, 출판사의 사회적 역할이야말로 공치사도 못 받으면서 섬세함과 지성은 그것대로 당대 최고 수준이어야 함도 확인이 가능했네요.
아무리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조주라 해도, 그 피조물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며 작가의 의도와 독립된 영역이라고 하겠습니다. p57을 보면 울프는 본인 역시도 캐서린 맨스필드의 작품을 읽으며 이런저런 주관적 해석을 가하지만, 동시에 해밀튼, 매카시(일반 독자를 가리키는 임의의 호칭인 듯합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이름이 몰리인 걸로 봐서 그녀의 주 독자층이 여성들이었음도 추론 가능합니다) 등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각양각색의 해석을 시도하는 데 대해 그녀 자신이 신기해합니다. 여기서 서간의 수신인인 클라이브 벨은 영국의 평론가였으며 울프와 비슷한 또래입니다. 뉴질랜드의 맨스필드도 우리가 <The Garden Party> 등으로 잘 아는 바로 그 사람이며, 태생은 뉴질랜드지만 영국에서 성장기 교육을 받았기에 보통은 영국 작가로 알고 있죠. 울프보다 몇 살 아래지만 작풍(作風)이 좀 전통적(?)이라서 울프보다 훨씬 이전 시절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맨스필드의 시대에 뉴질랜드는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가 되기도 했죠.
우리들은 백여년 전의 사건을 역사로 추체험하며 다분히 객관적으로 거리를 둘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특히 버지니아 울프 같은 지성인들이 전간기에 남긴 소통의 흔적을 보면, 그토록 명민한 지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라든가 동시대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의미에 대해 다분히 감성적으로만 접근하는 게 눈에 띕니다. 이런 경향은 사조와 스타일, 살아온 경력이 판이한 헤르만 헤세(나잇대는 비슷합니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직접 엮였거나, 지근거리의 사람들이 치른 경험에 대해서는 "초연함"의 유지가 어렵나 봅니다. 그토록 초연함의 미덕에 대해 강조했던 버지니아 울프였기에 이 점이 더 재미있는데, 그래서 역시 이런 분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알고 새삼 안도도 하게 되네요.
책의 마지막은 히틀러를 몸서리치며 싫어했던 울프가 미국의 어느 진보 저널에 기고한 글이 장식합니다. 이런 글을 읽어 보면 울프와 어떤 세대 차이 같은 게 전혀 안 느껴지며, 자유를 갈망하고 획일성을 거부하는 시대정신이 이미 성숙한 형태로 저들 지식인들 사이에 공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화를 희구하는 저 열렬한 외침은 이미 21세기 채식주의자를 자처한 어느 동아시아 여성 작가의 육성도 고스란히 승계했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