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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캡슐 ㅣ 텔레포터
이재은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4년 9월
평점 :
소설 속의 배경인 비주얼 시티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서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상대의 내면과 교감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겉모습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해 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용한 의사와 시설을 찾아 외모를 아예 바꿀 생각마저 품고 실행에 옮기는데, 그 결과 거리에는 내가 아닌 남의 가면을 쓰다시피한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넘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소설에는 비주얼의 변형을 금지하라며 시위를 벌이는 대중도 등장하는데, 물론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이유로 집회를 열기까지 하는 이들은 없거나 극히 보기 힘들지만,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감추려는 시도에 대해 곧잘 무시와 경멸감을 과장되이 표현하곤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표현과 자기신체 처분의 자유가 누구에게도 있으므로 성형 정도야 뭐 큰 문제삼을 게 있을까 싶지만, 때로 큰 배신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나 봅니다. 한국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플라스틱 서저리가 발전한 나라도 드물겠으므로, 과연 이 소설 같은 기발한 픽션이 나올 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뭐 아줌마? 내가 어딜 봐서 아줌마로 보여? 어디 아줌만지 할머닌지 너도 한번 그 비주얼템을 벗어봐!(p18)" 이미 디지털 트윈이라는 게 개인의 생활 영역에서는 거의 구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카카오페이지든 인스타든 유저는 자신의 계정에다 진짜 모습을 올릴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필터를 사용하고, 동영상에까지 보정을 가하여 배경의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우스꽝스러운 효과가 속출합니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비주얼템이라는 걸 착용해 꿈 같은 외모를 하고 돌아다니는데, 이게 우리들이 가상 공간에서 온갖 허위의 치장을 하고 방문자들을 기만하는 행태와 대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 것도 마스컬레이드 본능이라며 너그럽게 이해해 줘야 할지, 아니면 본격적인 존재의 타락 단계로 접어드는 시그널이라며 단호하게 제재를 내려야 하는지는 정말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떤 육감, 혹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라는 게 있어서, 아무리 먼 거리에서 누군가가 잔뜩 치장을 하고 다녀도 우리는 아 저 사람이 실제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구나, 혹은 차마 감당 못할 무슨 힘든 일이 있나 보다, 이렇게 제법 확신을 갖고 판단합니다. 소설 p35를 보면, 비주얼템을 착용했음에도 선생님 눈에 빤하게 보이는 어떤 근심, 힘듦이 도은한테서 바로 풍긴다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실 성형수술이든 진한 화장이든, 이 픽션 속의 비주얼템이든 간에, 진짜 문제는 진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결정적인 진실을 가려 주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노출시킨다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그만큼이나 힘이 세며, 우리들도 예상외로 다들 현명하기에 그 진실을 잘도 캐치합니다.
"니가 차도은이라고 지금 광고하고 다니는 거야?(p50)" 정상적이고 당당한 정신이라면 차도은, 선예, 혜선, 모현이라고 나를 내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 차도은 여기 있다며 광고할 만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게 인생의 목적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이 픽션 속이건, 21세기의 현실이건 이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금기 사항 중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비주얼 시티에서는 누가 자신을 최대한 과장하고 미화하는 게 능력의 척도이기까지 합니다. 인플루언서의 파워(p58)는 얼마나 이 은폐 도구를 잘 활용하는지로 측정됩니다.
소설에는 초반부터 저 비주얼템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도구로 등장하는 게 여덟 자리의 커넥트키입니다. 도은이의 경우 엄마아빠, 학교출결시스템 등이 고작입니다(p50). 이건 우리의 현실에서라면 인친이나 팔로잉 시스템과 유사합니다. 넷상의 소셜 미디어처럼 unsocial한 공간도 없는데, 소설 속의 커넥트키도 사실은 진정한 세상으로부터의 디스커넥트 키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비주얼 시티가 익숙한 사람들은 다른 세상이 있는 걸 모르더라고(p62)." 이 말에 송모현은 벌써 시무룩해지는데 그나마 모현이 정도면 양반입니다. 인터넷에만 파묻혀 열심히 역할 놀이만 하느라 자신이 진짜 누구였는지 잊은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는 수두룩합니다. "그 주제에 뭘 믿고 리얼리티에 가입한다는 거야?(p107)" 아니, 내가 내 자신을 과감히 믿고 현실로 복귀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내 손을 잡아 주겠습니까? 망상과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임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깨우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