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화감각 - 이상하고 가끔 아름다운 세계에 관하여
미시나 데루오키 지음, 이건우 옮김 / 푸른숲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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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아마 잡화점이었겠습니다. 한 분야에 특화한 전문점(p88)이라면 어느 정도 소득 수준이 높아야 사람들이 주목할 테고, 오지나 빈촌에도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가게는 잡화점 유형이었겠습니다. 책 p12에도 나오지만 이 업종은 "구시대의 장사"가 맞습니다. 이문도 박하고 안면 위주라서 빤한 한계가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우치 유가 쓴 p208의 해설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계는 잡화화되고 있다." 대체 잡화화(雜貨化)의 개념이 뭔지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또 아라우치씨가 저 페이지에 쓴 대목에서 아주 압축적으로 요약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사정은 현해탄 건너 남의 나라 사정이지만은 않습니다. 나이 많은 세대에게는 곰표 중력 밀가루 같은 투박한 상품의 촌스러운 디자인이 (팍팍했던 살림에 대한 기억 말고는) 별 감흥이 없을 텐데, 젊은이들 사이에서 레트로 열풍이 일어나 밀가루와는 별 관계도 없는 다른 상품들에까지 이 브랜드가 붙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상품에다가 독특한 의미를 붙여 모에[萌]화하는 것도 이 책에서 말하는 잡화화의 일종입니다. 이뿐 아니라 편의점의 이런저런 기획상품, 예전에는 그냥 형편이 어려워서 찾곤 하던 다이소 같은 곳이 최근 트렌드화해서 대기업 제품도 입고되는 게 다 이런 유행의 일환입니다. 사람은 본디 지루하고 단조로운 걸 무척 싫어하는 동물이며, 상대 소득은 줄고 희망은 점점 줄어드니 이런 식으로라도 삶에 활력을 주입하고 싶은 필사적인 발버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소니플라자의 예를 들며 잡화시대 한 지점의 영광을 환기하는데, 소니 같은 글로벌 대기업의 명칭이 잡화점에 붙는 것도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독자인 제 생각으로는 그런 이유로 "그 플라자"에서 소니의 이름이 결국은 떨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물론 직접적으로는 기업의 생존 전략 자체에 변화가 있었던 탓이지만 업종과 기업이 서로 궁합이 안 맞았던 결과로 못 볼 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잡화가 언제나 궁상맞음, 영세함, 초라함과 매칭되는 건 아닙니다. 일본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이런저런 럭셔리 편집샵도 (이 책의 관점에 따르면) 잡화점의 변종일지 모르겠습니다. 잡화점의 본류는 따로 있으므로 "진화"라고까지 할 건 아닙니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p34)." 무슨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도 아니면서, 잡화점 안에서는 책들도 일개 장식품 노릇으로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책이 비하되는 건 또 전혀 아니며, p214 역자 후기에서 이건우 역자가 말하듯 한국의 박상영 작가도 자신의 책이 그리 쓰여도 환영이라고 자신의 SNS에 표명한 것도 어찌보면 그런 맥락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화점 안에서는 뭔가가 살짝 비틀리면서 본연의 맥락이 변질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p62를 보십시오. 저자는 잡화점을 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던 음악을 "잃었다"고까지 말합니다. 한국에서 5060 시니어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주구장창 8090 음악을 BGM으로 틀어대는 가게들이 많은데, 한때 청춘들을 설레게 했을 그 음악들은 상술의 맥락 안에서 뭔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한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p110)" 저자의 저 결론이 약간은 비약일 수 있지만, 앞 p31에서 저자는 이미 일본이라는 나라가 에도 시대 이래 수백년 동안 변두리 감각으로 살며 선진 외국의 문화적 영향에 압도되길 즐겼다고 회고합니다. 그게 바로 키치의 본질이죠. p78을 보면 이미 본래의 미의식을 상실하여 대체 뭐가 뭔지 헷갈리게 된 통에 "귀여워!" 같은 반응으로 퉁치게 된 혼란스러움, 이야말로 모에화, 잡화화의 핵심입니다. "잡화의 노래를 들어라!(p66)" 주파수는 이미 그렇게 맞춰졌습니다. 

p138에서 저자는 도예가 구도 도리 씨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본래 도예야말로 잡스러운 것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야 할 영역이지만, 어쩐지 구도 선생의 예술 세계는 점차 잡화화의 심오한 경지(?)가 그 수렴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습니다. 저자가 특히 구도 씨에 공감하는 건, 어려서부터 예술하시는 부친 밑에서 영향을 받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잡(雜)이란, 우리말에서 뭔가 본연의 개성이 없고, 삼류와 싸구려 사이에서 배회하며, 그 접사를 붙이는 순간 욕설로 변해버리기도 하는 상서롭지 못한 어휘입니다. p16을 보면 일본도 이런 사정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평판 좋은 지사제 정로환까지 우리와 공유하는(그 명명과정은 대단히 불측하지만) 일본의 사정이라서 흥미롭고 정겹게 읽힌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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