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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 수업 -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정영훈 엮음, 김익성 옮김 / 메이트북스 / 2024년 8월
평점 :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서양 고전 철학을 집대성한 인물입니다. 철학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각으로는 자연과학, 수사학, 의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통달한 천재라는 느낌을 주는데, 당시에는 학문이 분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철학이 모든 지식을 아우르는 범주였으므로 그가 철학자라는 말은 곧 그가 모든 걸 안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인생의 해답을 구태여 철학자에게 묻는 사람은 없겠으나, 저렇게까지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당대에 인생에 대해 뭔가 결론을 낸 게 있다면 궁금해지는 게 당연합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이런저런 관점들을 이천 수백 년 전에 이미 정초한 선각자적 인물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미덕을 강조한 철학자였습니다. p70을 보면 그의 평소 지론대로 중용의 의미가 자세히 설명되는데, 명예에 있어서는 유독 이 중용의 경지를 정의하는 용어, 개념이 없다고도 합니다. 야심이 부족해서 샤이한 사람을 두고는 그렇다고 일컫고, 야심이 넘치는 사람을 두고는 야심가라고 부르는데, 그 중용에 머무는 이는 부르는 말이 없다는 거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야심의 영역에서 적정선을 지키는 사람은 진정 중용의 미덕자라 불릴 만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공연한 욕심을 부리다 기존에 가진 것까지 모두 잃고 후회막급인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게 됩니까? 살면서 어느 선만 잘 지키고, 있는 복만 잘 방어해 내도 누군가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는 없습니다.
책에서는 중용을 잘 지키는 사람이 곧 성실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특히 중용의 덕을 지키기 어려울 때가 즐거움(p120) 관련인데, 책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온갖 사람이 온갖 방식으로 과오를 범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쾌락을 추구할 때 이성을 잃기 쉽고, 지금 아니면 언제 이걸 누려 보겠냐고 브레이크 없이 치닫기 쉽습니다. 무절제한 사람은 쾌락을 당장 손에 쥐지 않으면 어쩔줄 몰라하고, 더 큰 문제는 그 쾌락을 손에 넣고 나서도 쉽게 휘발되는 만족감 때문에 더 높은 강도의 무엇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점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에뤼식톤과도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범죄, 불의가 바로 이 중용을 지키지 않아서라고까지 말합니다. p188을 보면 간통이라는 범죄(현재 한국법상으로는 범죄가 아니지만)는 무절제의 결과이며, 전쟁터에서 도주하는 범죄는 용기라는 덕목을 포기하고 완전한 비겁함으로 폭주한 결과입니다. 다만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재미있게도 순수하게(?) 불의해서 저지르는 범죄(협의의 불의)와, 그저 절제하지 못해서 저지르는 경우를 구분하는데, 어떤 금전적 이익을 위해 저지르는 간통은 무절제의 경우와 다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먼 데서 원인을 찾자면 돈에 대한 욕심을 절제 못 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조선 숙종 대(代) 김춘택이 자근아기와 간통한 걸 두고는 아마 그의 권력욕이 과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습니다.
p234에서는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를 구분합니다. 실천적 지혜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론적 근거 면에서는 아직 인식이 철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주저할 틈 없이 행동에 옮겨야 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애써 따지지 말고 이런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자칫 실천적 지혜가 철학적 지혜보다 열등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전자가 후자를 이끌고 가는 수가 더 많으니 아이러니일 수 있다고 책에서는 말합니다. p249에서는 큰 욕망을 가졌는데도 이를 애써 참는, 플라톤적 절제의 모범에 가까운 인물이 있는가 하면, 보잘것없는 작은 크기의 욕망 충동에도 불구하고 크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으며 진정한 무절제는 후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사랑(philia)을 강조했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게 철인, 인격자, 이상적인 경우를 논하기 때문에 p304 같은 곳에서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먼저냐, 아니면 자기애가 먼저냐의 논의가 다뤄집니다. 물론 현대인에게 물어보면 당연 후자라고들 하겠으나 조선 시대에만 해도 자기 이익을 먼저 따지는 사람은 소인배라 하여 정계에서도 쫓겨나고 양반 간의 교유에 끼워 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 논의에서도 친구를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나 자신이야말로 제1의 친구라는 입장을 포함하므로 서양 고전 철학 역시 자기애를 마냥 폄하한 건 아님을 확인 가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행동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바로 행복(eudaimonia)라고 했습니다. 칸트가 정언명법을 강조하며 윤리적 행동에 별개의 이유가 없으며 무조건 그리 행동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과 대조됩니다. p318을 보면, 훌륭한 사람이라면 친구를 자기 자신처럼 대하는데, 고전 라틴 격언처럼(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사람이긴 했습니다만) 친구는 바로 제2의 자신이기 때문이겠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친구를 자신 곁에 두고, 건전한 가치관을 교류하며 행복감을 증진하니 친구야말로 행복의 필수 조건 중 하나입니다. 당신 곁에는 과연 얼마나 좋은 친구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