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전략 - 소설의 기초부터 완성까지 오에 컬렉션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성혜숙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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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선생은 따스한 주제가 담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준 작가였지만, 그가 남긴 소설들이 이룬 세계를 돌아보면 마치 튼튼한 성벽 주변에 깊은 해자(moat)를 두른 듯합니다. 이는, 동경대 출신 엘리트인 그가 애초부터 치밀한 전략 하에 작품을 창작했음을 뜻합니다. 만약 그가 고유의 소설론을 남기지 않았다면 평론가나 학자들이 그의 내면과 동기를 탐구라느라 진땀깨나 흘렸겠으나, 다행히도 그가 직접 이렇게 정치한 이론을 구성한 바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비교적 손쉽게 오에 월드의 조감도와 도면을 참조하여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나아가 소설과 문학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단어(들)의 열거 자체가 문학적 기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p58)." 이는 이노우에 히사시가 청대 문인 장종지의 글에서 발췌한 바가 묘하게도 그 음성적 효과와 더불어 일본 독자들에게 미학적 쾌감을 선사했다며 오에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글쎄, 우리 한국인들도 (건륭기[乾隆期]의 문장가들처럼) 위장에 통증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역시 이 예(例)로부터 외형률의 고유한 느낌을 의도대로 접수하기란 쉽지 않을 듯합니다(한자의 발음이 다르므로). 물론 수사법으로서의 열거법은 꼭 두운, 각운 등의 음성 요소가 개입해야만 성립하는 건 아니며, 적시적소(適時適所)의 열거 그 자체가 레토릭의 효과를 냅니다. 러시아의 평론가 바흐친은 이를 장사꾼의 호객행위와도 닮았다고 했다는 오에의 지적이 p58에 나오는데, 어딜 감히 문학의 기법에 비기냐고 할 수 있어도 사실 그 근본이 같음은 부인 못합니다. 한편으로 저런 바흐친의 언급까지도 꼼꼼히 짚어내는 걸 보면 역시 선생은 박식한 분입니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학문적 대성을 이룬 미르치아 엘리아데라는 종교학자가 있으며 해당 분야에서 엄청난 위상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의 주요 저작들이 이미 빼어난 솜씨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엘리아데와 비슷한 처지였던 문장가 에밀 시오랑(아름다운 산문의 매력으로, 한국에도 폭 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었죠)이라든지, 부조리극의 대가이자 대명사인 이오네스코(뭐 새삼 소개가 불필요합니다) 같은 이름들이 매우 정겹게 언급됩니다. 사실 이들 문인들과 오에 선생이 직접적인 교분을 나누었던 건 아닙니다. 저 세 사람은 루마니아 혈통인데다 나이도 다들 비슷한 또래지만 오에는 거의 저들의 아들뻘이죠. 다만 이들의 유려한 프랑스어 문장을 선생이 진심으로 사랑하여 깊이 파고들었고, 그 연구의 결과가 이처럼 깊어졌다 할 수 있습니다. p100 이하에 오에 선생의 르상티망(resentiment)론(論)이 짧게나마 나와 독자의 흥미를 부르기도 합니다. 

오에 컬렉션 제3권 리뷰에서 제가 미시마 유키오를 짧게 언급했었는데, 이 제4권에는 미시마 유키오 부부와 오에가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 일화가 간접적으로 회고되어 흥미롭습니다. 사실 오에가 노벨 문학상을 탄 데에는 1960년대부터 꾸준히 그의 작품을 영어로 옮겨 온 존 네이던의 역할이 적다고는 못합니다. 그런데 오에는 이 대목에서 한때 친구였던 네이던이 사실을 크게 왜곡하여 자신이 미시마의 부인과 갈등을 빚었다고 거짓말을 서문에 썼다며 불쾌감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네이던이 어떤 극작가 기질이라도 발휘하여 독자의 흥미를 위해 한 편의 소극을 꾸렸겠다며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이해하려는 관대한 모습을 보입니다. 어쩌면 이 모두가, 본래부터 친한 사이였던 두 분 사전 합의 하에 빚어진 유쾌한 소통극인지도 모르겠네요. 

윌리엄 블레이크는 20세기 후반 들어 토머스 해리스의 스릴러 <레드 드래곤>에서 중요한 모티브 구실을 하는 등 재조명되어 대중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에밀 시오랑도 "인간은 이 험하고 모순 가득한 세상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 같은 비관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p130에 인용된 블레이크도 "아기는 요람 속에 있을 때..."라며 비슷한 냉소주의를 표명합니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농도 짙고 진정성 높은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오에가 이 말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독자들도 익히 알듯, 오에에게는 날때부터 신체가 불편했던 아들이 있었기에 일생을 두고 그를 향한 연민과 괴로움에 시달린 바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심원한 달관은 그런 시련에 직면해서도 비관과 염세로 치닫기보다 오히려 초극과 낙관의 진로를 잡았기에 독자에게 감동을 줍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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