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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의 두건 ㅣ 캐드펠 수사 시리즈 3
엘리스 피터스 지음, 현준만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평점 :
수도사의 두건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중세 문화의 전반적 수호자, 지성인 노릇을 했던 가톨릭 성직자들의 제복 중 두부 착용 파트를 가리키기도 하고, 이 책 p73에 나오듯 약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자연 상태에서야 약초가 따로 있는 법이지, 아무리 약초라도 그로부터 특정 성분만 고순도로 정제해 낸다면 바로 독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p38].") 주인공 캐드펠 수도사는 약학 지식에 매우 능한데,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장크트벤델 출신 세베리노 수도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의 캐드펠은 사실상 detective이기 때문에, 구태여 <장미의 이름>에서 누구를 매칭시키자면 단연 배스커빌의 윌리엄이겠습니다.
옛 여인을 만나는 일은 당연히 설렙니다. 보넬 가에 재취한 마님에 대한 이야기를 메이리그로부터 들을 때만 해도 캐드펠은 세상이 그렇게 좁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넬 씨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아무래도 변사체로 간주해야 할 그의 시신을 누군가에게 검시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장원에서 캐드펠을 소환했을 때, 캐드펠은 바로 이 댁 여주인이 과거의 그녀임을 알아챕니다. 반면 레이디 보넬은 그를 일단 알아채지 못한다고 나오는데, 본래 남자란 세상의 모진 풍상을 겪으면 그 영혼이 열두 번도 넘게 변합니다. 그저 세파에 찌들어(작품에서는 그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고 나옵니다) 노화를 겪어서가 아닙니다. 반면 안정적인 가정에서 조용히 육아와 가사에 몰두해 온 여인이라면 그 정신의 빛깔이 대체로는 그대로입니다. 동창회에서 "너 참 안 변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 타입이죠.
p88에 나오는 행정관의 냉정한 말을 보십시오. 그는 여태 자신이 처리해 온 숱한 사건들의 어떤 패턴에서 벗어나는, 간교한 범죄자의 예외적인 동기와 수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수도사님의 해박함은 그 용의자의 체포, 자백 앞에 구태여 필요 없는 것이 될 겁니다." 중요한 건 행정상의 편의, 당국의 권위 확립, 공포를 통한 가짜 평화의 회복 같은 게 아닙니다. 무엇이 진실이며, 간악한 범죄가일시 파괴한 정의를 회복하는 게, 주님의 명분이건 세속의 이익을 위해서건 지상의 과제일 텐데, 행정관은 자신의 인간적 양심을 배반하면서까지 힘으로 진실을 덮으려 듭니다. 캐드펠은 이런 자들의 역겨운 행태를 여태 지겹도록 겪었습니다.
<장미의 이름>에서 식료계 담당이었던 레미지오 수도사의 직분을 연상케 하는 캐릭터가 이 작품의 페트러스입니다. 물론 그 개성은 사뭇 다른데, 레미지오 수도사는 그 작품에서 특별한 동기를 지니고 제법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죠. 여기서 페트러스는 다혈질에 괄괄한 성격으로 세팅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이름이 같은)의 실제 개성과도 닮았습니다. p138에도 나오듯, 캐드펠은 사실 페트러스와 좋은 사이가 아닙니다. 광신, 광신... 그 대상이 종교이건 신념이건, 일단 사람이 광신에 빠지면 세상을 흑과 백 둘 중 하나로만 몰아넣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공동체는 문제가 생겼을 때 올바른 방법을 모색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자신의 물건을 훔칠 수도 있을까요? 말만 들었을 때 너무도 이상하여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싶어도 법학은 기묘한 가능성의 향연을 전개하기도 하는지라 이게 현실에서도 제법 높은 빈도로 일어납니다. 캐드펠은 성인치고(또 그가 겪어온 삶의 치열함을 감안할 때) 다소 키가 작은 편이나, 자신이 루퍼스의 주주인라고 외치는 소년은 해당 말을 결코 훔치지 않았음을 좌중과 캐드펠에게 납득시키는데 그의 미묘한 설득력는 맑은 눈빛, 남달리 큰 키 등에서도 조금은 비롯하지 않나 짐작합니다. 그 말은 레이디 보넬의 것일까요? 또 이 소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사람 하나만 잡아들이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던 사건이, 알고보니 당초 예상대로 흘러가는 구석이 대체 없습니다.
중세가 암흑의 시기라는 건 그저 종교의 압제가 과학적 지성을 질식시켜서가 아니라, 이처럼 일상에서 일어나는 범죄, 질서의 교란이 그저 권위자의 전단만으로 미봉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보넬 같은 유력자의 생명도 이처럼 음모와 착각에 의해 진상이 오도될 뻔했는데, 아무 힘도 없는 민초의 운명이야 얼마나 하찮게 희롱되었겠습니까? 비뚤어진 분노, 질시의 폭발이 마치 정의감의 발로인 줄 착각하는 어리석고 사악한 무리들의 의도를 보기좋게 꺾어버리는 게 캐드펠의 지혜와 용기입니다. 어둠이 빛을 결코 이길 수 없듯, 캐드펠의 방대한 지식과 명철한 판단력이 악에 기생하는 숱한 음모꾼들의 추한 시도를 그 근원부터 박멸하는 과정이 통쾌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