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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인류학 강의 - 사피엔스의 숲을 거닐다
박한선 지음 / 해냄 / 2024년 7월
평점 :
종(species. 種)이란 교배의 물리적 한계를 긋는 집단이라고 대략 규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도 혼종이 태어나는 등 예외가 없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이 종이 다르면 후손이 안 생기거나, (그 후손에게는) 계속적인 생식이 어렵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종의 창조는 거룩한 신의 섭리라고 부를 만도 하겠는데... 찰스 다윈은 이 역시 자연선택의 결과일 뿐이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구태여 종교를 개입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진화론이나 자연선택설을 다윈이 최초로 고안한 것은 아니나,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이를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체계화했으며 그 치밀하고 종합적인 논리를 접하고서야 당대인들이 비로소 세계관 전체를 이성적 존재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기껏해야 백 년 정도를 살아내는 개체입니다. 그러니 개체 단위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미처 알아챌 수 없습니다. p68에는 익투스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가정하여, 자손 수만 대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치아가 날카로워지는 변이가 쌓이고쌓인 끝에 어느 대에(代) 이르러서는 다른 물고기와 이빨 모양과 기능이 완전히 달라지는 기적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어디 "익투스"뿐이겠습니까? 몸 사방에 가시가 꽂혀 이를 쏘아내며 맹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고슴도치, 피부가 크게 손상되어도 놀라운 재생력을 발휘하는 악어,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각종의 새 등, 오랜 세월에 걸쳐 개체의 피나는 노력이 쌓이고 쌓여 이뤄낸 진화의 기적은 끝도 없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생각하는 능력을 발전시키고 추상적인 통찰까지 수행하는 두뇌를 지니게 된 우리 인간의 사례일 것입니다.
p71을 보면 성 선택(性選擇)은 자연의 입장에서 비용이 많이 드는 경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보듯, 개체가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으로 번식하는 방법은 단세포, 무성 생식입니다. 인류가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항생제라는 놀라운 혁신을 이뤄냈으나, 바이러스나 세균, 혹은 벼룩 빈대 등 해충은 이에 내성을 길러 살아남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핵전쟁의 결과로 유해방사능이 지표에 확산하면, 인류 대부분은 암 등의 질환으로 사망하겠지만 바퀴벌레 등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변이만을 거쳐 기어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현재, 인간 같은 (이른바) 고등동물이 취한 번식 방법은 대단히 번거롭고 불편하며, 환경이 급변할 때 비효율적이기까지 합니다.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진화한 걸까요? 책에서는 매력적인 아들 가설, 비싼 신호 이론 등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사실 사람만큼, 교배 행위 자체에서 커다란 쾌감을 찾는 동물은 없습니다. 이게 어떤 진화론적 필연 같은 건 아니고, 생존에 별 이득이 없어도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공작 수컷의 화려한 외관 등).
p94를 보면 나리오코토메 소년 화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년의 키는 160cm 정도로 아직 성장이 덜 끝난 상태, 젖니가 빠진 후 턱에 생긴 염증이 낫지 않아 결국 어린 나이에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정말 강인한 존재인 듯하면서도, 이처럼 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몇 가지 장애물을 넘지 못해 허무하게 생을 일찍 마치기도 하는 슬픈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들에게만 이런 안타까운 일이 생기는 게 아니며, 21세기의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은 드물지만은 않게 닥칩니다. 호미닌(hominin)은 침팬지속(屬)과 사람아족(hominina)를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화석으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력한 인류 조상들, 호모 에렉투스, 호모 게오르기쿠스 등의 필사적인 노력을 보면, 사람이 이처럼 두 손을 자유롭게 놀려 도구를 만들고, 숭고한 감정을 발휘하여 종교와 예술을 만들고 헌신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오랑우탄, 침팬지, 심지어 곰도 가끔은 두 발로 서고 이동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만큼 사족보행과 확실히 결별한 종(種)은 없습니다. p137을 보면 사람은 이족보행을 시작하면서, 전신골격이 발달하고, 감각운동에 관련한 신경계가 진화했다고 나옵니다. 도구 제작 능력, 사회적 상호 작용도 이와 밀접하게 엮여 오늘날의 단계처럼 정교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두발걷기는 타 동물이 볼 때 대단히 어렵고 부자연스러울 만큼 까다로운 동작이고 신체 기능이지만, 인류는 이를 통해 에너지를 크게 절약하고 남는 활력을 정신 작용 쪽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여러 마리의 새끼를 쑴풍쑴풍 잘 낳고 출산 직후에도 잘 돌아다닙니다. 오직 인간만이 암컷이 매우 힘들게 아이를 낳고, (다른 동물들과 비교할 때) 일종의 미숙아 상태로 아이를 낳는다고 책 p140 이하에 나옵니다. 그래서 신생아 때에, 아기가 그리 귀엽지 않고 쭈글쭈글하다가 좀 커서야 예뻐지는 게 이런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진화론적으로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다며 여러 흥미로운 가설과 이론을 들려 줍니다. p156을 보면 주먹도끼 등이, 기능상으로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을 때에도 좌우대칭의 예술적, 심미적 형태를 띤다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티븐 미슨 등이 제기한 "섹시한 주먹도끼 가설(sexy handaxe theory)" 같은 것도 나왔다고 합니다. 책 앞부분에 나온 "성 선택 이론" 등과 결부하여 역시 흥미로운 맥락에서 읽힙니다.
이 책은 호모(homo)는 어디에서 왔으며, 사피엔스(sapiens)는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 속성인지에 대해 재미있으면서도 깊이 있게, 우리 존재의 근원과 지향점을 깊이 숙고, 통찰하게 돕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양 과정에서 학생들의 큰 호응을 받은 박한선 인류학 박사,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유려하고도 치밀한 강의를 통해 우리들도 지식의 신세계로 즐겁게 인도됩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를 통해 해냄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