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의 실존의 미학, 내 삶의 예술가 되기 - 천경의 미셸 푸코 읽기
천경 지음 / 북코리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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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모든 학문의 어머니와도 같습니다. 철학의 유력한 학파는 다른 학문, 예컨대 정치학이나 역사학, 심지어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까지 영향을 끼치며, 반대로 다른 학문에서 어떤 충격적인 결론이 도출되거나 하면 거꾸로 철학에까지 귀납되어 새로운 경향, 사조가 탄생하기도 합니다(드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그러했듯이). 저는 개인적으로 경희대 정치학과 이동수 교수님이 지속적으로 펴내는 "다층적 통치성 총서"를, 새 권이 나올 때마다 읽고 리뷰하는 중인데, 그 총서 전체가 미셸 푸코의 체계 중 한 지류를 전제로 삼고 그를 바탕으로 편찬되는 중입니다. 철학자 한 사람의 위력이라는 게 이렇게나 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 평범한 독자들은 위대한 철학자의 삶과 사상으로부터, 작고 미미한 내 인생의 긍정적인 면을 더 부각하고, 어떤 비전을 개척하며,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을 모색할 수도 있습니다.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전의 철학자가 나처럼 평범한 독자 한 사람을 위해 어떤 생각을 표현하며 문장을 남기지야 않았겠지만, 나는 이 거인이 책을 통해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나를 다듬고 나 안에 있는 좋은 생각과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미셸 푸코의 철학이라고 하면 그저 난해하고 고답적이라 내 인생과 뭔 상관이랴 싶기만 해도, 이 책 저자 천미경 편집장님처럼 인문을 직접 내 삶의 정초 도구로 삼아 하나의 소중한 목표를 향해, 더뎌도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갈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이 책 p46을 보면 아니나다를까 미셸 푸코의 수많은 업적 중 통치성 담론에 대해 저자는 설명합니다. 프랑스어 원어로 gouvernementalité(구베르너멍뜰리떼)인데, 이 어원이야 라틴어 gubernare이며, 정부 또는 통치라고 하는 gouvernement(구베르너멍. 영어의 government)이야 예전부터 있던 단어지만, 여기에 접미사 -ité를 붙여 완전히 새로운 개념 하나를 창조한 건 20세기 철학자 미셸 푸코입니다. 이 책 p47에서도 그의 기여에 의해 "정치학이 (비로소) 통치성 개념을 전유하게 된다"고까지 규정합니다. 

또 여기서 그 유명한 판옵티콘論이 도출되어, 대중이 권력의 통치성 기조에 따라 배치되고 통제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슈퍼베스트셀러였던 <감시와 처벌>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저 뜻이죠. 삶의 전영역에 개입하는 권력! 소박한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은 간데없고, 한술더떠 내 스스로가 권력에 순치되어 나의 사고와 행동을 내가 알아서 굴종시키기까지 하니 어찌 무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1984>의 마지막 대목에서 주인공 윈스턴이 자발적으로 "나는 대형(빅브라더)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듯 말입니다. 

p76 이하에 나오는 것처럼 푸코는 규율권력과 생명관리권력 둘로 나눠 근대 통치체제의 새로운 생리를 꿰뚫어봅니다. 전자는 프랑스어 원어로 pouvoir disciplinaire이며, 후자는 biopouvoir입니다. 영어의 power도 바로 저 불어 원어에서 왔다는 게 모양만 봐도 티가 나듯(정확하게는, 서로 동계어), 수식어와 피수식어 순서만 바꾸면 이 경우는 영어 불어가 아무 차이도 없다시피합니다. disciplinaire(영어의 disciplinary)는 우리말 번역만 갖고서는 그 뜻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으며(저 번역어 "규율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매를 들고 혼내 준다는 이미지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학계 일각에서 저 개념어를 "기율권력"이라고도 옮기는 것입니다. 기강을 잡는다 같은 느낌이 살게끔 말입니다. 

근대권력기제에서 소름끼치는 점은, 규율권력의 세련화, 정밀화에도 있지만, 개체를 상대로 한 게 아닌 인구집단을 타겟으로 삼는 생명관리권력 부문입니다. 근대권력은 학문의 발전과 권력의지 자체의 집요한 수위 상승에 힘입어 인구집단 전체를 관리 대상으로 삼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세수(稅收)를 추출하고, 인적 자원의 생산성을 높여 정부 권력의 주된 동력으로 삼을지에 골몰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체 사회의 원활한 작동에 도움이 안 되는 개인의 경우 무자비하게 배제, 제거, 폐기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멀리갈것도 없이 나치 독일이 장애인, 유대인, 집시, 성소수자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명,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목숨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사람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 공자 등의 가르침들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근대권력의 통치성이 이런 방향으로 흐르는 건 명백히 수천 년 인류 문명이 흘러온 지향점이라든가 인류 통성,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것입니다. 

p146을 보면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가 설명됩니다. 우리는 쾌락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고대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한 쾌락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인간은 쾌락을 좇는 게 그 본성이니 억지로뭘 누르려고 하지 말고,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 자체를 바른 방향으로 잡아 건전한 쾌락을 탐닉하라는 뚯이니 현대인이 보면 쾌락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금욕주의로 오해할 만합니다. 푸코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에피쿠로스주의는, 개인이 권력의 도구가 되지 말고, 특히 생명조절권력에 휘둘리지 말고, 나라는 대체 불가능 개인이 뭘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탐구하라는 겁니다. 특히 미디어에 세뇌되어, 내가 원하지도 않는 상업적 여성상(남성상)을 무작정 동경할 게 아니라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이성을 찾으라는 거죠. 

p183 이하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을 지배하(려)는 권력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불행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왜? 남 위에 군림하려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고 결국 괴물이 되어 버리니 말입니다. 역대 얼마나 많은 왕, 독재자들이 말년에 정신이상이 되어 모두를 망쳤습니까. 그들도 누군가의 아빠, 엄마, 자녀, 베우자로 소박한 행복을 추구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도요. 이처럼 권력은, 통치성은, 사람을 그 참된 인간성로부터 유리시켜 불행으로 치닫게 합니다.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주창한 루소의 깊은 뜻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겠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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