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섬과 박혜람 - 제2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임택수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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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도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사랑은 보통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미련없이 모든 걸 불태워야 한다고도 하지만, 정작 한창 버닝하는 당사자도 그렇게 하기 힘든가 봅니다. 내가 이런 동기로 그에게 끌려도, 상대도 나를 좋아해도, 서로에게 다른 걸 기대하고 만난 두 사람이 상대를 속속들이 알기 힘들고, 결국 그렇기에 한때 뜨거웠던 사랑도 식고, 이 감정의 앙상한 잔재가 서로에게 남긴 바가 무엇인지 깊이 회의하고, 환멸에 빠지고... 그 누구도 사랑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게 이 때문입니다. 확신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겠네요. 

박혜람이 파리에서 돌아온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녀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동기뿐이지 않았냐는 겁니다. 뭐가? 김섬을 다시 찾은 게 말입니다. 우리는 멜로물에서 다시 돌아온 누군가를 놓고, 왜 니가 다시 와서 잘 살아가는 나를 들쑤시냐고 원망하는 장면을 곧잘 보곤 합니다. 김섬은 이미 아슬아슬해하던 독자들이 보기에는 그나마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통지표(p123), 아니 홍지표가 이미 그녀 곁에 제법 오래 있어줬기 때문인데, 그래도 (약간 스포를 하자면) 홍과 김의 관계를 박이 괜히 끼어들어 파탄낸 것까지는 아닙니다. 홍은 그 나름대로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박이 아니었다 해도 결국 김과 오래 이어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박이 얄미운 게, 여튼 김-홍 관계의 파탄에 대해 미필적 고의를 갖고 밀고 들어온 게 아니었나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p29를 보면 프랑스어 동사 faisander에 대한 준오의 설명이 나옵니다. 준오의 말대로 이 단어는 꿩이나 그 고기를 가리키는 faisan(퍼장)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어가 본래 그렇지만 라틴어를 거쳐 받아들인 단어입니다. 그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이지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예를 들어 p26 같은 곳에서 이슬람의 어원이 평화냐 아니면 복종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논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핏대를 올리며 싸울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슬람의 어원이 복종이라고 해도, 먼 옛날 복종이라는 단어가, 특히 중동인들에게는그리 부정적이지 않았을 겁니다. 유교 문화권에 오래 살던 우리 조상들이(지금 우리들과는 크게 달리) 충(忠)이라는 단어를 보고 마음에 뜨거운 것이 밀려왔듯 말입니다. 

준오, 장은주, 송강, 현수호, 샤를리, 제롬, 앙리, 건우, 엘렌, 정우 말고도 이 소설에는 길거나 짧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p75의 어느 노부인은 처음 보는 박혜람에게 "프랑스를 좋아하세요?"라고, 그것도 사무적으로 묻습니다. 마치, 20년 전에 죽은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제목이라도 읊듯 말입니다. 예전에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별로가 된 것들은 보통의 우리에게도 한 트럭씩은 다들 있습니다. 지적인 캐릭터들이라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혜람이 날치기범을 향해(테러범 아닙니다ㅋ) 그놈이라고 부르는 대목(p58), 어느 영국식 영어 사용자의 get the f*** out of here 어쩌구라며 불평하는 말(p42), 김섬 아빠 후배 동호 아저씨(경상도 사람)가 불량배한테 이 새* 어쩌구 하며 쫓아버리는 장면(p140) 등 극히 적습니다. 

재혼 상대로 예전에 알던 누군가를 찍어 놓았건만 공교롭게도 그 자녀들끼리 이미 감정이 생겼더라, 이런 이야기는 한국식 막장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있었던 희비극입니다(저 한참 뒤에 보면 김섬 엄마하고 동호 아저씨하고도 뭔 일이 생깁니다. 내 딸 어쩌구 하던 게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오죠). p63에 나오는 샤를리와 제롬이 그렇습니다. 프랑스는 말만 대혁명의 나라이지 은근 차별이 심하죠. p50을 보면 톨레랑스도 간데없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 이슈는 샤를리뿐 아니라 저 뒤에 밝혀지는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p230에 보면 김섬은 사춘기 때 성당(원래는 다녔던)에도 나가지 않고 독립적으로 지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짧은 구절이 그녀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김섬한테조차, 어렸을 때 고생했다는 그 누구(스포)는 간접으로나마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거죠. 결국 둘은 길게 이어지기 힘들었겠고, 사실 김섬부터가 일시 도피처로 oo에게 어떤 환상을 품지 않았었나 저는 생각합니다. 뭐가 어떻게되었든 간에, 박혜람이 이기적이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불교나 천주교나 희한하게 오체투지 관행이 있는데, 박혜람이 이 쇼를 하는 장소는 법당(p177)입니다. 

苦樂汝自當 邪正由汝已. p176에서 혜람이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인용합니다. 이 말의 묘미는 고락, 사정 모두 부정적인 개념이 앞에 온다는 점, 부정적인 감정과 체험에 더 방점을 두며 모든 게 당사자인 네가하기 나름이라는 뉘앙스를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앞구절에 當이라는 술어로 종결지어 영어의 deserve라는 느낌을 주고 종결부에는 어조사 已를 두어 박력을 더합니다. "부활은 화려한 듯해도 상처를 그대로 안고..." 그런데 그래서 부활이 위대한 것 아닌가요? 상처가 (보다시피) 이렇지만 난 살아났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소설의 김섬은 기실 부활이 내키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처가 가슴아팠던 나머지, 그 이전 무구하던 시절만 바라던 나머지, 그냥 아픈 대로 자신의 고치에 그대로 머물고만 싶은.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칼을 들게 하더라고(p160)." 이 말도 저는 허세 같았습니다. 

이 점을 박혜람은 알았던 듯하고 그래서 저는 라미 누나(p46)가 밉네요. 등장인물들의 연배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게 배경으로 등장하는 음악들입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바르쿠 네그루)>라든가. 음악이 소설 장면장면과 잘 어울려서 마치 음성지원이 되는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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