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하나 옮김 / 코너스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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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고전 <인간실격>은 일본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참 꾸준히 읽히는 듯합니다. 작가와 그의 피조물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밀접하게 교감하는 듯 착시까지 부르기에, 우리 독자들도 이 작의 주인공 오바 요조 못지 않게,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실제 생애에 대해서도 많이들 압니다. 이 코너스톤판에는 담백하게, 소설의 본문과 작가 연보만 실렸습니다. 

또 지금 보는 대로, 이 책은 1948년 초판본의 디자인을 그대로 따 와서 출간했습니다. "인간실격"이라는 글자(한자)가 나뭇잎 도안과 함께 명랑하게(?), 발랄하게 배열된 중, 정자체로 큼직하게 太宰 治(태재 치), 즉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이름이 찍혔습니다. 당시의 디자인 감각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디자이너가 작품을 다 읽고 그 나름대로 떠오른 느낌을 표지에 충분히 담은 결과물이겠다는 추측도 하게 됩니다. 2021년에 코너스톤에서 나온 벨벳 양장본을 읽고 리뷰를 올린 적 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펴낸 번역본이라서 본문 텍스트는 거의 같습니다. 

"봄바람 속에는 백일해를 유발하는 세균이 수십만, 이발소에는 탈모를 일으키는 세균이 수십만...(p97)" 선천성면역결핍증(CIDS) 환자인 주인공이 평생 멸균 캡슐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The Boy in the Plastic Bubble>라는 1976년작 영화도 있었지만, 이 작의 오바 요조는 몸이야 멀쩡해도 정신이 아픈 청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특별히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 아니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남들보다 유리한 여건에서 혜택을 받고 성장했다면서, 사회와 외부환경에 대해 이처럼이나 신경증적이고 부적응스러운 태도라니,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밖에서 보는 이들마저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비상식적이고 병적인 주인공의 넋두리에 대해 왜 우리 독자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을 보내는 걸까요? 장폴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잘 알려진 언명도 있었지만, 우리는 대개 나만의 자아와 취향과 고집과 쾌락 안에 머물고 싶지, 타인의 의견과 이해 앞에 나를 희생하고 양보하고 맞춰주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저 설익은 자아를, 그나마 끝까지 지키고 싶었으면 저런 병적인 반응이 나올까? 저런 병적인 케이스를 보면서 까딱 길을 잘못 들었으면 나 역시도 저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안도감에 젖는 것입니다. 

오바 요조는 무작정 자기 세계 안에만 머물려 들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마음에도 없는 광대 놀음을 하면서 반대로 사회와 타인들에 과잉적응하려는 기태까지 보였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란 것도 남들 보기에 부러웠으면 부러웠지 불리한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지나친 행운은 면역을 올바르게 못 갖추게 방해한다는 점에서 기이한 불운이 될 수도 있으며, 독자들은 이 점에서도 은근히 뭔가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저것 봐라. 복(福)이 꼭 복으로 구르는 것만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면, 남의 불운을 즐긴다는 이른바 schadenfreude(샤덴프로이데)인 셈이므로, 그에 대한 미안풀이인지 또다시 이상한 동정을 요바 요조에게 보내고... 아마도 이런 선순환(?)이, 이 고전에 유지된 오랜 지지와 선호 그 비결이 아닐까 제 멋대로 짐작합니다. 

본인도 인간이면서 다른 인간의 심리, 이기심, 위선 등의 행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라... 어쩌면 우리 모두들도, 태어났을 때엔 나쁜 재주를 양심 때문에 쉽게 부르지 못하고 머뭇대다, 마지못해 사회의 타락한 물결에 휩쓸리고 똑같은 검정 때가 묻어 그렇게그렇게 떠내려갑니다. 오바 요조의 저런 병적인 몸부림과 표백을 보며, 나 역시도 과거에 저런 순수에의 집착으로 고민하며 부끄러워하던 때가 있지 않았나 하는 회한과 자괴감, 이런 느낌이 독자를 휩싸고 도는 것 아닐까요. 

p29를 보면, 요조는 다케이치라는 급우에게, 체육 시간 일부러 광대짓을 하느라 미끄러진 자신의 의도를 읽혔음을 알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합니다. 사실 다케이치인지 뭔지하는 꼬마가 특별한 통찰력이 있었던 건 아니겠습니다. 우리들도 어렸을 때 다 그런 경험이 있죠. 아이들은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실제 상태를 지적하듯, 권위나 맥락 등을 고려치 않고 팩트를 바로 직시할 때가 있습니다. 요조 역시 내면의 동기와 의도를 들키고 마치 국부를 노출한 듯 극한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별난 건 광대짓이라기보다(이런 건 요조 아니라 누구라도 한 번 정도 하며, 심지어 어른이 되어서도 합니다) 그의 순수한 수치심입니다. 수치심을 애저녁에 잊은 다른 사람들이 문제인 거죠. 

p99를 보면 질 떨어지는 만화를 연재하며 할 일을 가까스로 찾은 요조가 자신의 작품에 중세 페르시아의 시인 우마르 하이얌(책의 표기에 따릅니다)의 시구를 인용하곤 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마르 하이얌의 작품 세계는 요조 같은 이가 쉽게 공감하기엔 꽤나 이지적인데, 그래도 그 특유의 허무주의, 회의적 구절들이 그의 마음을 끌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p111에 나오듯 요조의 의식과 자아를 평생 동안 괴롭혔던 건 선과 악, 죄와 더렵혀짐에 대한 강박이었습니다. 이 모든 고뇌를 한 번에 떨치려면 시니시즘만한 특효약이 없겠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이런 처방은 부작용이 너무 심하죠. 진정한 악인은 아예 가책이 없고 요조는 따지고보면 남의 책임을 자신이 대신 고뇌한 셈이니 이런 불쌍한 이가 또 있겠습니까.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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