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세기 초 독일에서 활약한 문학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유쾌하고 흥미로우며 다분히 교훈적이기까지 한 중편 소설입니다. 중편으로 분류하기에도 약간은 짧은 분량이며, 책의 40% 가량은 역자인 원로 독문학자 최문규 연대 교수의 작품해제, 작가론이며 이 대목이 본 작품 못지 않게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역자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책 곳곳에 가득 배어나며, 국내 독자에게 다소 낯선 작가이니 만큼 이런 역주와 해설이 더욱 필요했고 유용했다고 하겠네요. 

폰 샤미소라는 이름은, 성씨의 본체인 사미소가 프랑스식인 반면, 성씨 앞의 신분을 나타내는 파티클 von은 또 독일식이라서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책 후반부의 해제에도 나오지만, 샤미소 가문은 원래 프랑스 귀족이었는데 대혁명 와중에 거의 멸문지화를 겪고 프로이센으로 이주했습니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도 비슷한 배경을 지닌 사람인데 이분은 주로 불어로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폰 샤미소와는 다릅니다. 샤미소가 더 젊으면서도 더 일찍 타계했습니다. 

p9, p11 등에 나오는 프리드리히 바론 드 라 모트 푸케도, 물론 특별한 그들의 문학적 재능이 그들을 그리 이끌었겠지만, 가문의 배경부터가 서로 매우 닮았기에 그만큼 서로 도타운 친분을 오래 유지한 게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샤미소 가문이 대혁명 때 그런 난관을 겪었는데, 푸케 가문은 그로부터 백 년 전에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을 통해 날벼락을 맞은 케이스입니다. 루이 14세 치세로부터 대략 90년 전 앙리 4세가 즉위하여 부르봉 왕가를 열었으며, 그의 혈통이나 혼인을 통해 프랑스는 종전과는 다른 레벨의 대통합 왕국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할 기회를 잡았는데, 그가 반포한 낭트 칙령은 이런 시대정신에 잘 부합했습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다양한 세력과 국민을 두루 포용할 큰 그릇이 마련되어야 하며 이는 군주 자신의 기량에 좌우됩니다. 그런 뜻에서, 거시경제 융성에 핵심 역할을 하던 위그노 교도들을 기어이 (미친 광신도 카트린 드 메데시스의 망령에 씌어) 프로이센으로 추방한 루이 14세는 그 후손이자 군주로서 아주 못난 선택을 한 셈입니다. 그 위그노 교도들은 후진국 프로이센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여 국운 융성의 소중한 장기 자산으로 삼았습니다. 드 메데시스나 루이 14세의 편협하고 추악하며 어리석은 세계관과 인성이야말로 현대로 치자면 안티톨레랑스, 증오, 혐오, 반(反)진보, 퇴행의 화체와도 같습니다. 

비록 곤경과 좌절 가득한 시국 때문에 힘들었다 해도 폰 샤미소의 작품 속 주인공은 품위와 인격, 고상함을 잃지 않습니다. 유럽 설화에서 그림자가 없다 함은, 보통은 악마 자신이거나 그와 특별한 관계임을 암시합니다. 소설은 벌써 초반부에, 어느 화려한 연회에 참여한 수수께끼의 "회색 옷을 입은 사내"가, 자신의 주머니로부터 온갖 물건, 동물들을 다 끄집어내는 장면에서부터 그 환상적인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주인공인 페터 슐레밀도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소설을 읽던 저도 "이게 뭐지?"하며 혹 잘못 읽은 줄 알고 놀랐더랬습니다. 회색 옷을 입은 사내는 악마답지 않게 매우 정중하고 예의바르며 그 검은 속내를 끝내 드러내지 않는데 이것도 이 샤미소 버전 메피스토펠레스(?)만의 특징입니다. 

그림자만을 팔아넘겼다는 건 아직 영혼을 판 단계까진 아니며 일종의 체험판 구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세상의 어떤 편익도 구매할 수 있는 금화를 무한정 뽑아낼 수 있으니 이 거래라는 게 썩어빠진 세상을 편하게 사는 데에는 전혀 손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림자를 상실한 후로, 그에게는 참다운 인간 관계라는 게 불가능해지며 어딜 가도 "그림자가 없는 수상쩍은 신사"라며 배척되고, 나아가 사랑하는 여인 미나와 맺어질 수도 없습니다. 슐레밀을 이해하는, 세상의 단 한 사람은 하인 벤델이며, 하인 신분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고상하고 진실된 인격 인품을 갖추었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어설픈 귀족이나 향신들보다 훨씬 우월한 인물입니다. 욘, 파니, 그리고 끔찍한 라스칼 등도, 이 작품에 명시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으나 아마도 회색 옷을 입은 악마로부터 모종의 거래를 제안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마는 과연 악마라서, 그와 계약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은 비참한 말로를 보내고 죄 없는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라스칼도 아마 악마와 계약을 하기 전까지는 악당(라스칼)이 아니었을 겁니다. 슐레밀 씨는 처음에 잘못된 선택을 했었으나 나중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기에 결국은 구원을 받았고 말입니다. 

역주나 해제에도 나오듯이 작품 후반부 주인공의 행적은 지질학자, 여행가, 과학자였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실제 생애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구성되었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폰 훔볼트의 생을 다룬 <훔볼트의 대륙>을 책좋사에서 당첨되어 읽고 리뷰를 남긴 적도 있었기에 더욱 뜻깊은 독서였습니다. 인간은 역경 속에서 그 참된 가치가 드러나는 법이며, 악과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결의만이 그를 구원할 유일한 방도임을 일깨우는 멋진 작품이었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