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 시인수첩 시인선 80
이어진 지음 / 여우난골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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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님의 시집입니다. 책은 시집 판형으로 나온, 분홍색 표지의 아주 예쁜 모양입니다. 표제작인 <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는 이 책 4부의 p110에 나옵니다. 사과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는 p47의 <사과의 시간>이 있고, 호수는 p86의 "얼음 호수"라는 제목 안에 들어 있습니다. 보통은 호수보다 크기가 훨씬 작을 사과 안에, 어떻게 호수가 자랄 수 있는지는 이 시집을 다 읽고도 알아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혹 사과를 먹을 기회가 있다면, 그 안에 어떤 호수가 담기진 않았는지, 나아가 그 호수가 자라고 있진 않은지 자세히 살펴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들 것 같습니다. 

시장에 들르는 시간이 보통 오후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눈부신 햇빛 때문에 모자 챙을 더 내려야 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하지만 p26 <봄의 무희>에서 시적 화자는 "정오의 시장"에 가는 중이며, 그 "눈동자를 지폐의 주머니에 넣고 흔들흔들 걷기"를 희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빨들을 빼내어 산들산들 공원을 산책하고 싶다"고도 합니다. 좀 무섭기도 하지만(?) 활기찬 시장과 평화로운 공원은 눈이 보내는 신호,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무엇을 빠각빠각 씹어 소화시킬 치아 따위와는 무관하게, 내가 그 자체로 사랑하고 끌어안고 그 안에 하나가 되어야 할 공간이 아닐까, 그런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과연 바다는 파랑과 하양의 파장이 합쳐져 이루는 사인곡선일 수 있습니다. 내 눈동자는 내 눈동자에 머물지 않고, "봄의 눈동자에 포개"야 더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지 않을지. 

"얼굴보다 더 먼저 떨어진 것이 있었다...꽃을 피우도록 애간장을 다 바친 뿌리의 눈알이 흥건히 고여서(p32. <동백>)". 식물 옆에 떨어진 꽃잎[落花], 더군다나 동백처럼 빨간 빛의 꽃잎이라면 정말 피와 함께 떨어진 빨간 눈동자처럼 때로 섬뜩하고 아깝게 느끼기도 합니다. 떨어진 꽃잎은 과연 얼굴이고 눈동자입니다. 이 예쁜 꽃을 피워 올리기 위해 뿌리는 얼마나 필사적으로 땅으로부터 양분을 위로 위로 빨아올렸을까요. 그 수고는 아무렇지도 않고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곰 한 마리가 무심하게 꽃을 툭툭 건드리고 빨기도 하고 마침내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예사롭게 꽃을 꺾고 밟고 다니는 우리들도 곰처럼 무정합니다. p68의 <마음의 동굴>에서도 가녀리고 슬픈 꽃잎들의 심상이 나옵니다. 

여름철에 해변에 가면 많은 이들이 모래인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어설프게 잘못 만들어진 사람도 있고, 제법 큰 공을 들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망가지기도 합니다. 만든 사람도 언제까지나 조각품을 곁에서 지킬 수는 없고, 어스름이 닥치면 애착은 뒤로 하고 자리를 떠야 합니다. 그래서 해변에는 남자, 여자 둘만 남았고(p54. 둘 다 모래인간), 그들은 밀물과 함께 서서히 허물어져 가는데 남자가 여자 몸 위에 쏟아져 내리는 게 더 슬픕니다. "나"는 바닷물을 움켜쥐는데 사라지는 건 바닷물이 아니라 내 손가락입니다. 내 울음소리는 저 모래인간들처럼 허물어지는 게 슬퍼서 나는 소리일까요. 

우리는 중학생 때 시(또는 운문)에는 산문과 달리 운율이라는 게 있다고 배웠고, 정형시에는 외형률, 자유시에는 내재율이 깃든다고 들었습니다. p74에 나온 시는 <내재율>인데, "새소리가 깨어나는 숲은 모든 안개가 詩 같고", "구름의 날개를 바라보면 온몸에 깃털이 돋는다"는 화자의 말에서 정말 어떤 리듬이 전해집니다. 시 같은 안개, 또 구름을 보고 깃털이 돋는 듯한 나의 몸. 시인의 입에서 운율이 깃든 시가 나오는 건 시인의 마음 안에 이미 운율이 살아 숨쉬어서 가능하겠습니다. 달처럼 커다란 광원은 온전한 거울을 갖기 힘들지만(p82), 눈 위를 걸어가며 내가 눈처럼 흩날리는 듯 느끼는 사람은 이미 존재가 하나의 아름다운 운문이며 사과 안에서 자라는 담백한 호수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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