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아트북 : 크리스토퍼 놀란의 폭발적인 원자력 시대 스릴러
제이다 유안 지음, 김민성 옮김, 크리스토퍼 놀란 서문 / 아르누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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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힌두 경전에 나오는 말을,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수한 후 탄식처럼 내뱉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죠.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미 2014년에 낭만 가득한 SF영화 <인터스텔라>를 만들어 그의 과학에 대한 소양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 관객에게 증명한 바 있습니다. 이 영화는 SF는 아니고 아웃사이더 기질이 강했던 한 천재 과학자의 전기인데, 이 아트북을 통해 하나의 걸작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재능과 열정이 바쳐져야 하는지 그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책의 원제는 "UNLEASHING OPPENHEIMER"인데, 보통 어떤 제품이나 시스템의 완벽한 설명서, 매뉴얼 앞에 UNLEASHED 같은 수식어가 붙는 관행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약간의 유머도 감지되고 뭔가 독자, 관객 앞에 겸손하게 제작 과정을 풀어 놓는 듯 삼가는 마음씀도 와 닿네요.  

킵 손은 이미 <인터스텔라>에서 제작에 깊숙이 관여하여 큰 도움을 줬고 인터스텔라 관련 책도 쓴 적이 있습니다. p100을 보면 이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로 扮했던 킬리언 머피가 킵 쏜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오는데 이제는 많이 늙은 모습이네요. 킬리언 머피는 <배트맨 비긴즈(2005)>에서부터 놀란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이 감독이 참 아끼는 배우인데 이 작품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설득력 있는 연기력을 보였습니다. p28을 보면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찍은 오펜하이머의 사진이 나오는데 물론 븐장의 덕이기도 합니다만 제법 닮았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생전에 언제나 염두에 두었던 "현상(오펜하이머가 직접 쓴 말은 아니고 영화 제작진이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도 책에 나오네요. 전자들의 움직임 같은 것)"을, CG를 쓰지 않고 아날로그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 놀란 감독이 자세하게 술회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킵 쏜이 조언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CG가 처음 나올 때는 이제 배우, 특수촬영 등 모든 과정과 도구를 XG가 대체할 것이라는 섣부른 예측이 있었습니다만 이제 관객 눈에도 지겹고 놀란 같은 장인한테는 오히려 기피 경로 취급이나 받는 게 현실입니다. 

핵 실험은 그게 어떤 큰 부작용을 가져올지 모르므로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 멀리 떨어진 오지였던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제작진은 p124 같은 곳에서 회고하길, 고스트랜치(역시 뉴멕시코 주에 있습니다)에서 상당 분량을 찍되, 실제 그 실험이 이뤄진 로스앨러모스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구조물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어떤 시대물이라도 마찬가지인데, 실제 배경과 그를 그럴싸하게 현대에 재구축한 세트 사이의 배합 비율을 적절히 조절하는 게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세트는 제작진이 가진 해당 주제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그저 배경이 아닌 미장센이기 때문에 이 역시도 실물에 마냥 양보를 할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 주변에서 여러 관계를 형성하던 과학자 무리들도, 당연한 소리지만 누군가의 연기를 통해 영상에서 재현되어야 합니다. 이들에 대한 캐스팅 과정도 매우 흥미로우며, 처음에는 소단락의 제목이 "오펜호미"라고 붙어서 무슨 뜻인지 했는데 p158에 그 철자도  Oppenhomies라고 나옵니다. 또 p168을 보면 제작진이 특히 즐겁게 회고하는 장면이 1943년의 크리스마스 파티인데, 프로덕션 디자이너(=미술감독) 더 용(de Jong)의 멘트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p45를 보면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으로 扮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나오는데 저는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누군가 했었습니다. 놀란 감독이 감탄하는 대목이 뒤에 나옵니다. 어니스트 로런스 박사 역의 조시 하트넷도 그럴싸합니다. 리처드 파인만 역의 잭 퀘이드, 닐스 보어 역의 케네스 브래너(p78. 이분은 셰익스피어 극 전문 배우죠), 트루먼 대통령 역의 게리 올드먼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부터 놀란 감독은 영화 한 편 찍는 데에 엄청난 인적 자원을 동원하고 컨셉을 살인적으로 디테일하게 설계하는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이 아트북을 통해, 마치 기업 하나를 짓는 듯 장인 정신으로 임하는 미국 영화계의 열정과 체계적 비즈니스 마인드를 엿볼 수 있어서 너무도 유익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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