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트메이커
탬진 머천트 지음, 김래경 옮김 / 위니더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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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사람의 성씨는 그 사람의 직업을 따서 만들어진 게 많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는 Smith인데 대장장이, 세공인 등의 뜻을 가집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The Hatmakers인데 문자 그대로 모자 만드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성씨가 해트메이커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코델리아를 비롯해서 바다에서 실종된 그 부친 프로스페로 씨, 고모 등등 해서 모두 해트메이커들이며, 원제에는 복수 접미사 -s가 붙었으므로 "해트메이커 가문, 해트메이커씨네 사람들"이란 뜻도 됩니다.  

이 가문은 그저 흔한 모자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왕이 쓰는 특별한 모자를 제작하는, 나라 안에서 대접깨나 받는 장인들입니다(p157을 보면 코델리아에게는 숙녀의 미덕을 가르쳐 주는 가정교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p306을 보면, 이 사람 아주 웃기는 인간이더군요). 그래서, 평민들을 눈 아래로 보통 보곤 하는 궁정의 시종들한테도 코델리아가 매우 당당하게 대하는 장면(p39)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해트메이커는 그저 고급 의관을 제작하는 이들이 아니라 더 중요한 직분까지를 수행하는 이들인데 더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라서 여기까지만 적겠습니다.(나중에 망또 장인, 장갑 장인, 지팡이[cane] 장인, 신발 장인, 시계 장인 등도 나옵니다) 

p186을 보면 이 해트메이커 집안이 얼마나 유서 깊은지가 페트로넬라 대고모를 통해 설명됩니다. 튜더의 헨리 8세, 스튜어트 조의 찰스 2세, 반란자인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등 뭐 브리튼 섬의 전 역사와 가문의 연혁이 궤를 같이하는데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또 여기서 고전 라틴어 금언 noli nocere(p26)의 또다른 뚯이 밝혀지기도 하네요! 길드 홀(p227). 장인들은 사실 중근세를 통틀어 왕, 귀족, 성직자와 더불어 봉건제 질서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였습니다. 시민 혁명이 발발하며 왕과 귀족, 성직자 계급이 파멸했고, 이어진 산업혁명이 장인층을 날려 버린 건 우연이 아닙니다. 

본문 중에도 역주가 나오지만 이 소설은 어떻게 된 게 등장인물 대부분의 이름이 서양 고전 명작에 나오는 캐릭터들에서 따왔습니다. 그래서 읽어 가며 약간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코델리아는 (역주에 나오듯)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그 바른말 잘하는 셋째딸의 이름과 같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로스페로(<템페스트>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한)의 실종이라면... 아마도 저 먼 바다 어느 섬에서 권토중래의 그날을 기다리며 은둔할 듯한 기대가 드는 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뿐 아니라 이 소설 중에는 명작이나 고사가 자주 레퍼런스되는데 예를 들면 p98 같은 곳에서 역주가 꼼꼼히 달려서 지금 이 서술이 무엇을 염두에 둔 오마주인지 일일이 설명합니다.  

왕(이나 그의 후계자)으로 태어나면 과연 행복한 삶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역사상 왜 그렇게도 많은 군주들이 그렇게나 황음무도한 극단의 쾌락에 빠져 살았을까요? 사직, 나라와 수천 생령의 안위가 자기 손 안에 달렸다고 생각하면 그 중압감이 가히 살인적일 테니, 그런 식으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국사는 전혀 돌보지 않고 주연에만 몰두한 암군 폭군의 수도 매우 많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조지 왕은 요즘 말로 ADHD인 듯도 보이고, 뭔가 정신없는 위인입니다. 실제로 19세기 초 재위했던 영국의 조지 3세가 말년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섭정(그 아들)이 들어선 적 있습니다.  

은하철도 999에서 테츠로(철이)가 영생을 찾으러 온 우주를 헤매듯이, 혹은 데 아미치스의 쿠오레에서 마르코가 엄마 찾아 대서양을 건너듯이, 코델리아는 아빠 프로스페로 씨를 찾아 바다를 뒤지고 다닙니다. "잃어버린 사람은, 찾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 저는 코델리아의 이 대사를 읽고, 마치 TV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고려 태조 등이 말하는 "병이 있는데 왜 약이 없단 말인가? 자네가 그러고도 의원인가?"가 생각났습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말하는 사람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지죠. 하긴 죽은 사람이라면 (시신 말고는) 찾을 길이 없겠으나, 아직 사망이 확정 안 된 사람이라면 그를 찾을 일말의 가능성이 남았다는 뜻도 되긴 하죠. 

중근세 서유럽은 정복왕 윌리엄이 해협을 건넌 이래 오랜 앙숙이던 영불 양국이 외교적으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그 안녕이 좌우되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는 루이 왕(영국의 조지보다 더 수가 많은)이 등장하여 이 소동의 배후에 과연 어떤 진상이 자리했는지가 서서히 밝혀지는데, 용감한 소녀 코델리아의 의지와 지혜가 이 난국을 수습하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세상은 과연 모험을 두려워 않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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