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로 만든 세계
마이클 울드리지 지음, 김의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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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프로그래머들이 하던 일은 비교적 명확했습니다. 정확한 연산 규칙을 주고 이에 따라 컴퓨터가 빠르고 충실하게 작업을 행하게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AI는 머신 러닝을 통해 규칙을 스스로 추출하고,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의사 결정 같은 것을 이루므로 과거의 EDPS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p31을 보면 "인공지능은 왜 어려운가?"라는 질문을 앞세우고, 이러이러한 난관이 있었기에 발전이 더뎠다는 설명을 내놓습니다. 

"이론적으로, 어떠한 알고리즘을 통해 문제 해결이 가능한지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현실화하는 데 소요되는 컴퓨팅 자원이 너무도 막대하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p34)" 이 답은 과거에 100% 유효했고, 지금은 네트워킹 기술이나 칩의 성능이 획기적으로 진화, 향상되었기에 어느 정도까지만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AI의 발달사가 비교적 오래전으로까지 올라가 잡히고 서술되는 거죠. 앨런 튜링 같은 이가 이미 자신만의 기준을 내세워 "무엇이 인공지능이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 논한 게 반 세기를 훌쩍 넘을 정도입니다. 2015년 알파고의 놀라운 퍼포먼스가 세계를 향해 공개되었을 때에도 일각에서 이런 비판이 있었기에, 이후에 구글은 새 버전은 전기(전력량)를 적게 먹는다는 등 IR 차원에서 여러 해명을 내놓기도 했었습니다.  

요즘 개발자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과거에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LISP라는 게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역주를 통해 저 약어를 "리습"이라 읽는다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달아 놓았습니다. 이 책(한국어판)의 제목이 "괄호로 만든 세계"인데, 저 리습에 괄호가 너무 많이 쓰인다는 이유로 "서로 상관도 없고 어리석게 보이는 수많은 괄호(lots of irrelevant silly parentheses)의 약자가 바로 LISP"라는 아주 재미있는 농담이 p62에 나옵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고, 리습의 의의는 결코 가볍게 폄하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리습을 발명한 이는 존 매커시인데 미국에는 매커시라는 아일랜드계 성씨를 쓴 유명 인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은 매우 유머러스한 필치로 쓰였으며, p63에는 이 존 매커시가 불멸의 업적을 남긴 다트머스 대학의 "그 여름학교"에 대해 독자에게 마치 엽편 소설을 들려 주듯 재미있게 서술했습니다. 물론 그해 여름의 특별한 세션이 아니었다 해도 나올 발명품은 나오고야 말았겠습니다만, 이처럼 재미있는 배경 설명이 곁들여짐에 따라 독자들은 리습 탄생의 필연성과 그 기여에 대해 더 깊은 성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략 고2 정도의 수학 과정에서 콤비네이션, 즉 조합이라는 개념을 배워 경우의 수 구하기의 아주 요긴한 도구로 쓰게 됩니다. p87을 보면 탐색나무의 크기가 상상도 할 수 없이 커지는 단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를 가리켜 조합적 폭발(combinational explosion)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데미스 하사비스(p214)가 2015년 알파고의 연산능력에 대해 홍보하면서 바둑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원자의 수보다 많다고 한 적 있는데, 이 역시도 조합적 폭발의 한 예가 되겠습니다. 이런 연산을, 기존의 컴퓨터로는 도무지 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이 역시도 최근에 들어 관련 기술의 발전에 따라 AI라는 도구를 통해 그 실현 가능성을 비로소 꿈이라도 꿔 보게 되었죠. 

윈도처럼 컴퓨터에 아무 소양이 없어도 일상에서 바로 쓸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있고, 전문가들을 위한 시스템이 따로 있습니다. 책 p114에는 에드워드 파이겐바움 교수가 고안한 덴드랄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R1/XCON의 예도 나오는데, 이는 DEC社가 개발한 시스템입니다. 이 도구들의 두드러진 특성은, 그것을 이용해서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학 교수들이 즐겨 쓰는, 나스닥이나 뉴욕증시 데이터를 이용하여 수익률과 각종 파라미터 간의 회귀분석을 행하는 tool들이 현실에서 돈을 버는 데 거의 아무 쓸모가 없는 점과 대조된다고 하겠네요. 사실 지금처럼 많은 기업들과 자본이 AI에 달려드는 이유도, 여기에서 엄청난 수익이 창출되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같은 페이지에는 리습(LISP) 전용 컴퓨터도 한때 사용되다가 윈도 탑재 PC가 대중화하며 사라진 사실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언어가 순전히 논리적 의사 표명의 집합구조라면 아마 적어도 30년 전에 이미 번역기가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정보 전달 외에도 감정의 표현이라든가 서사의 효과적인 전승 등 다양한 기능이 있고, 때로는 논리에 완전히 반하는 속성마저 가지므로, 논리 구조에 반하면 자폭(다운됨. crash)을 택하는 컴퓨터가 이를 온전히 해 낼 리 없습니다. p140 이하에는 재미있는 논리학 이슈를 이용한 농담 여럿이 등장하는데, 얼마나 인간의 언어(사실은 인간의 정신 자체)가 모순에 가득찼는지 확인 가능한 예이기도 합니다. 과연 앞으로 탄생할 본격(强) 인공지능이 이를 사람처럼 매끄럽게 다룰 수 있을까요? 

p176에는 인공지능이 과연 잘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 과제 중 베이지안 추론(Bayesian inference)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베이지언 확률 역시 한국에서는 고 2 수학 중에 배우는 내용이며, 내가 수학에 과연 적성이 있는지 어떤지 테스트할 수 있는 좋은 기준 중 하나입니다. 이게 직관적으로 이해되면 수학을 잘하는 천성이 갖춰진 것이며, 아니라면 노력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 합니다. 어떤 조건이 붙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특정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크게 달라집니다. 많은 이들이 이 차이를 이해 못하고 같은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직관이 논리를 배반하는 가장 뚜렷한 예 중의 하나입니다. 계산 잘하는 AI에게 이게 무슨 문제냐고 할 수 있으나, 확률은 본래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나마 가능성이 어떤 형태로 분포하는지를 알아내는 이론 도구입니다. AI도, 그게 정말 지능이라면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거다 저거다 결정을 내려야 하겠으므로, 이 이슈가 중요합니다. 

인공지능이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도윰을 줄 수 있는 분야 중 하나가 의학입니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한국의 가천의대 같은 곳이 진단과 수술에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도입했으며, 이 책에도 p246 이하에서 그저 수술 같은 기계적 작업뿐 아니라 진단에도 널리 AI가 활용되고 있으며 또 그 범위가 더욱 늘어날 전망이라고 서술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회사가, 알파벳의 자회사 중 하나인 딥마인드인데 여기서도 그 성과가 두드러지게 강조되네요. 

16년 전 레이 커즈와일의 베스트셀러 <특이점이 온다>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일부에서 황당하다는 비판도 들었지만 그 책에서 다룬 비전과 인사이트가 무척 원대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책 p266에서도 특이점에 대한 커즈와일의 해석(특이점 자체는 아주 예전부터 있던 개념이죠)이 다시 저자의 관점에서 분석되고 해설되는데, 결론은 현재의 각종 기술 발전이 특이점 도래의 (아주 느슨한)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범용 지능을 빠르게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 어느 인공지능(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발전하지 못한)이 개발되어 정말로 획기적인 인공지능(범용이든 혹은 그를 능가하는 무엇이든 간에)을 개발한다는 보장이 있는가? 저자의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인공지능의 활용에 대해 또 중요하게 숙고되어야 할 이슈가 규범과 법규 문제입니다. 인간 게놈 지도가 20여년 전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줄기세포 연구 등을 활용하여 유전공학이 각종 질병 치료에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인이 체감할 만한 발전은 찾아보기 힘들며, 과감한 시도를 하기에는 도덕과 실정법의 강력한 규제가 현실의 장벽으로 작용합니다. p281 이하에서 인공지능과 윤리의 문제가 심도 있게 다뤄집니다. 

이처럼 고도로 발달한 AI가 나온다면 과연 그에게 "의식(p336)"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의식이란 게 어차피 인간의 속성이므로, 무엇의 정신 구조를 그리 부를지 아닐지는 인간의 특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태 없던 것이 지상에 새로 나와 의미 있는 활동, 동작을 행한다면, 그것의 행동을 사전적으로 결정하는 내면의 그 무엇은 인간의 의식과는 사뭇 다른, 그야말로 낯선 미지의 무엇이겠으며 의식을 넘어선 원리와 구조를 갖췄을 수 있겠습니다. 

p368 이하에 용어 사전이 실려서, 읽다가 모르는 말이 나올 때 수시로 참조할 수 있습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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