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끌로이
박이강 지음 / 북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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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을 읽는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나 마찬가지라던데.(p9)"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이 말도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은 대번에 무릎을 치며 공감하고, 책 안 읽는 사람은 눈만 멀뚱멀뚱 뜰 법하죠. 요즘 성별이 모호한 상황에서의 사기 사건이 큰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 <올랜도(이 소설에서의 표기를 따르겠습니다)>은 작가 특유의 시니컬하고 염세적인 스타일에다 기발한 상상력, 소재(성 전환?)까지 더하여 당대 큰 화제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명작입니다. 

"리스트라는 걸 맹신하는 엄마(p17)".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명작 리스트라면 아마 서울대 선정 목록이겠지만, 사실 같은 페이지에 나오는 NYT 것이 수험생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훨씬 알찹니다. "난 그거 PC 물이 들어서 싫어"라고 누가 말한다면, 뭐 그냥 수험생 한정이라고 치죠. 여튼 이 장편소설에서 주인공 이지유는 비록 아이비리그 입성에 처음 실패했지만, 정말 뉴요커(p15), 아니 보스토니언이 되고 싶다면 PC건 뭐건 저걸 붙들고 빡센 시간을 채워야 할 겁니다. p15에 삭스피프스애버뉴가 나오는데 여긴 미국 동부에서 아주 유명한 명품 백화점 체인입니다(sixth도 아니고 socks도 아닌 Saks[쌕스]!).시어스는 망했지만 여긴 여전히 잘나가죠. 

마침 이 독후감을 쓰는 시간대가 할로윈을 앞둔 휴일이기도 한데 끌로이는 화가 미스터 올랜도의 초청을 받아 분장을 하고 파티에 이지유를 데리고 갑니다. 가는 도중 지유는 흐트러진 레게 머리(dreadlock이 맞겠죠?) 마약 중독 노숙자(p23)한테 칭총(동아시아인, 특히 중국인에 대한 멸칭) 소리를 들어가며 성o행 위험에 처하지만 칭총의 수호신(?) 끌로이가 기지를 발휘하여 달아날 수 있었네요. 드레드락 노숙자도 그러더니, 미스터 올랜도도 지유한테 천사라고 부릅니다(p33). 미스터 올랜도는 지금 드라큘라 분장을 하느라 얼굴이 허옇지만 지유는 원래 얼굴이 뽀얘서(p21) 그런 소리를 듣는가 봅니다. 아, 그런데 저 뒤 p107에서 지우는 멍청한 멘도에게 중국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듣네요? 다시, 저 뒤 p115에는 위드, 조인트 같은 말들이 나오는데 요즘 한국도 마약 때문에 아주 망조가 들어가죠. 

지유는 참 얼척이 없는 아이입니다. 경기변동을 정확히 알려 주는 선행지수를 찾아 학부 졸업논문 소재로 쓰겠다(p42)니 교수가 어이없어 할만하며, 그게 가능하다면 그 카츠라는 교수 말대로 노벨상 감 정도가 아니라 그날로 세계를 지배하는 이코노미 칭기즈칸이 될 것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대로 마이크로 파이낸스 같은 게 본인 역량이나 정치 성향에도 딱 맞죠. 

참 음악 공부라는 게 어렵습니다. 성악이든 기악이든 한국 출신 신동들이 처음에는 완벽 화려한 테크닉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아도 성인이 되어서는 잊혀지곤 하는 게 기교 그 이상이 아쉬워서입니다. 아니 연주자가 기교상 완벽해진다는 게 재능 외에도 미친 연습량이 있어야 가능한데,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래도 그게 그렇지가 않아서 어렵죠. "피아노는 널 잘 알아. 네 머리 위에서 널 내다보지(p68). 뜨거운 피가 필요해(p69)." 과연 지유 엄마는 기술 맹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p100에서 지유는 저 "뜨거운 피"에 대해 큰 오해를 하는데, 엄마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건 독자도 금방 알겠네요. 

엄마도 아빠도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는데 나이 들수록 여동생을 닮아가는(p79) 의사 (외)삼촌도 그런 사람이니 지유라는 애도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p91에서 음악에 대해 털어놓는 지유의 견해가 어떤지 보십시오. 저러니 재즈 장르가 귀에 들어오겠으며 <콘 알마>가 뭔지나 알겠습니까? 

저는 소설 중반부를 읽으며 멘도에 대한 지유의 감정이 뭘까, 아니 혹시 끌로이를 원하며 멘도를 질투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특히 p130 같은 데서 그런 게 뚜렷이 나타나죠. 지유는 멘도 같은 하루살이 부평초 인생에 대해 결코 동경하거나 환상을 품지 않습니다. 친구로서 끌로이를 걱정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죠. 누구 딸인데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4부에서 미지와 그런 일을 벌인 건, 결국 지유가 끌로이한테 그런 욕망을 갖고 미지를 대역으로 삼았던 것에 다름 아닙니다. 

p49에 나왔듯 지유 엄마는 예쁜 몸에 왜 몹쓸 낙서를 하냐며 문신이라면 치를 떠는 타입이었습니다. 이제 지유는 간이 부어서 "선타투 후뚜맞(p139)"을 각오하고 샵에 왔는데 아픈 엄마가 진정 명 짧아지는 머습을 보고 싶은지,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참 안타까웠습니다. 타투이스트 미지(미지 씨가 아니랍니다. 사실은 권미선. p189)는 지유가 영어 잘하는 게 몹시 부러운데, philosophy에서 h 철자 하나를 빼먹을 뻔했다고 깔깔거립니다. 지유가 귀티가 나서 좋답니다(p155). 하지만... 이런 애들이 원래 다 그렇죠. 

지유는 저 악질 권미선이한테 완전한 환멸을 느끼고, 동시에 끌로이한테 가졌던 호감 역시 하나의 허상이었음을 알고 꽤 충격적인 방법으로 이별을 실행합니다. 각자의 삶에서 이른바 "책임"을 지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도 실감하고선 말이죠.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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