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지금 이 책처럼 이름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대계(大係)"라는 이름으로 모아 놓은 기획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된 게 과거의 책들이 모두 절판된 건 물론, 비슷한 시리즈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이 책에는 이청준 작가의 유명한 단편 <병o과 머저o>, <이어도>, <화석촌>이라든가, 전남 순천 출신인 서정인 작가의 <가위> 등이 실렸습니다. 이 작품들은 너무도 유명하기에 이 책에서가 아니라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읽어 봤을 단편들입니다. 확실히 장편도 그렇고 단편도 예전 작가들의 작품이 필력이나 주제의식, 행간에 배어나는 공력 등 모든 면에서 요즘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이동하 작가는 혹 모르는 이들도 있겠는데 1980년대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들을 보면 그 단편이 자주 수록되곤 했던 분이더군요. 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 중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손오공>입니다. "손오공"은, 본명이 "손오억"인 주인공 기업인을 풍자한 네이밍인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작품을 잘 읽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손오억씨는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와 능력 하나로 전무직까지 올랐으며 오너의 사위이므로 곧 이 큰 회사의 살림을 도맡아할 신분입니다. 아랫사람들한테는 대단히 고압적인 매너이지만 워낙 능력이 출중하기에 아무도 반발하지 못합니다. 능력은 뛰어난데 인성은 아주 좋지 못하며, 회사 한 여직원과 깊은 관계를 이어오다가 싫증이 나자 이별을 통보합니다. 요즘과는 달라서 1980년대에는 이런 경우 여직원이 그냥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나 봅니다. 모든 상처와 불명예는 여자 쪽에서 뒤집어쓰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손오억은 갑자기, 모든 양심과 상식이 그 영혼에 회복되어, 여직원에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합니다. 즉시 회사 건물로 돌아가 여직원을 불러 상황을 수습하려 드는데, 방호원이 그를 가로막습니다. "누구신데 이 건물에 들어오는 거요?" 아니, 방금 전에 내게 호통을 듣더니 이 자가 정신이 나갔나, 어떻게 이 회사에서 나 손 전무를 몰라볼 수 있지? 그런데 방호원(경비)뿐 아니라 아무도 손 전무를 몰라봅니다. 기가 막혔지만 현실이 이러니 일단 인정하고, 자신의 사무실에는 지금 누가 앉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 전무 면담을 요청합니다.





사무실 안에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누군가가 앉아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여튼 손오억은 간만에 돌아온 양심의 힘을 빌려, 여직원에게 몹쓸 짓을 한 자신(?)을 혼내 주자는 생각에 그간 손오억이 저지른 모든 비리를 낱낱이 꾸짖습니다. 손오억의 탈을 쓴 저 누군가는 크게 당황하는데, 아마 자신의 비리를 캐려고 이 자가 장기간 미행이라도 한 줄 알고 거액을 제시하며 입을 막으려 듭니다. 손오억은 자신의 집까지 가서 아내와 어린 아들도 만나는데 이들 역시 손오억을 전혀 몰라 보고 저 남의 탈을 쓴 누군가를 남편, 아빠로 반길 뿐입니다. 





한편 손오억(진짜)은 회사를 관둔 여직원의 뒤를 몰래 쫓는데 놀랍게도 여직원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밖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 듭니다. 손오억은 잽싸게 그녀를 구해 준 후, 자신의 정체를 밝혀 봐야 아가씨가 안 믿을 게 뻔하므로, 용한 점쟁이라고 신분을 속인 후 그녀가 겪은 모든 불행을 다 짚어내는 척합니다. 아가씨는 놀라면서 점쟁이(사실은 겉모습만 달라지고, 과거의 기억은 그대로 가진 채 착한 마음만 도로 찾은 손오억씨)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진심어린 위로를 받아 기력을 회복하여 고향에 돌아가 늙은 아버지와 함께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립니다. 아버지도 갑자기 젊은 사위(?)가 찾아와 일도 돕고 딸한테 잘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제목이 손오공인 이유는, 마치 손오공이 서유기에서 제 머리털을 뽑아 분신을 만들듯, 악한 손오억의 만행을 견디다 못한 그 내면이 착한 손오억 하나를 뽑아내 세상에 내보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다만 겉모습은 전혀 달라진 채로... 겉모습이 그처럼 달라진 건, 내면이 극도로 타락하면 그를 반영해 겉모습 역시 다른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바뀐다는 일종의 비유, 상징으로 보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생각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