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조에 대해서는 평이 많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하여 거의 망국 직전까지 나라를 몰고간 무능한 군주였다며 호되게 비판합니다. 특히 이런 분들에게 용서될 수 없는 실책(혹은, 고의적인 처사?)이라면,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도저히 납득 안 되는 행적일 터입니다. 


반면 이 책 저자 같은 분은,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치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고려가 망한 후 시스템을 떠받치던 인재들은 하나같이 지조를 지킨다며 은둔하여 학업만 닦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건국 후 200년이 지나서야 폭 넓게 등용하여 요직에 고루 앉힌 군주는 선조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 4대 임금 세종부터가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은 선비들에게 벼슬길을 널리 열어 주었습니다만, 이런 바람직한 조치는 수양대군의 정변으로 인해 전통이 끊기고, 정부 요직은 훈구 대신들이 독점하는 폐단이 이어졌습니다. 


훈구 대신 중에서도, 지난 책프 리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신숙주 같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인물이 나와 국가 기초를 튼튼히 닦기도 했으며, 선비가 아주 등용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학통과 천거에 의해 선비들이 주도하는 체제는 선조 연간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또, 제승방략제가 와해되고 지방의 영진군이 유명무실화한 건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조의 잘못이 아니라, 그 이전 훈구파의 부패한 행태에 기인한다고 봐야 타당합니다. 따라서 선조는, 임란을 초래한 무능한 군주였다기보다, 오히려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 간신히나마 국체를 온전히 보존한 공이 있다는 점도 부인 못 합니다.


많은 이들은 "임란과 호란이라는 큰 국난을 치른 후, 조선이라는 체제가 진즉에 무너졌어야 이후 민족 단위의 번영을 맞았을 텐데, 그걸 해내지 못한 게 역량의 한계이자 비극의 단초"라는 주장을 합니다. 일리가 있으나, 어차피 심판은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민초들을 특별히 미개하게 봐야 할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당대의 백성들이 체제를 뒤엎지 않고 지지를 철회하지도 않은 것은 그 나름 존중되어야 할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죠. 아니라면, 이는 역사의 발전 주체가 민중이라는 전제를 논자들 스스로 부인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대주의 스탠스가 아쉽기는 하나, 명나라의 원병을 어쨌든 끌어오는 데 성공함으로써 왜의 야욕을 최종적으로 꺾은 건 분명 성과라면 성과입니다. 


선조를 두고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라고 하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모후가 왕비에 책봉되지 않은 최초의 군주라는 점입니다. 세조는 명백히 소헌왕후의 아들이었고, 중종 역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성종의 계비 정헌왕후의 소생이었습니다. 이후의 인종, 명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조는 자신의 부친을 추존왕으로도 올리지 않았는데 이 점 역시 독특합니다. 성종은 부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했는데도 말입니다.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이 대원군에 머물렀으니 선조의 모친인 하동 정씨 여시 하동부대부인에 고작 그쳤을 뿐입니다. 다른 하나의 의의는, 그전까지 왕좌가 직계 혈통으로만 내려왔으나(세조 제외 - 그러나 세조 역시 왕의 정실 소생 왕자였고 대군 신분이었습니다), 선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선대의 왕통이 끊기고 금상의 조카(그나마 이복 혈통)가 즉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조는 이런 취약한 위치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신하들에게 우습게 보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약한 군주, 자리보전이나 하는 임금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기는커녕 교묘한 정치술과 용인의 테크닉으로 오히려 피의 숙청을 때로 일으켜 가며 왕위를 보전합니다. 이렇게 힘들게 지킨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이, 천한 신분인 김개시를 지나치게 믿어(국정농단?) 반정의 수모를 겪은 건 아이러니컬합니다. 대신 왕좌에 오른 인조 역시 선조의 손자라는 점에서 이 군주가 여튼 역사의 패자 신세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명백합니다. 저 개인적인 추억(?)인데, 중학교 때 국사 담당 선생님이 "이 사람은 모든 면에서 우유부단하여 국난을 자초했고, 심지어 후계 문제마저도 어리숙하게 처리하여 이후의 모든 비극을 예비했다"며 호되게 비판하셨는데, 상당히 실력이 뛰어난 분이셨지만 이 이슈는 그리 단순히 단정될 부분은 아닙니다. 스타일이 다소 이기적이고 좀스럽기는 했어도 일방적인 비판을 받을 만한 군주는 아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김덕령 장군, 이충무공을 다룬 그릇된 처사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만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