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의 꿈
김춘기 지음 / 문이당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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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개성을 갖고 태어나며, 이 갖가지 개성들이 마치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제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라야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원활히 돌아갑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의사, 변호사이기만 하다면 어디 그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랜 세월 동안 현장에서 아이들을 지도해 오신, 생각 깊으신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는 대략 이와 같은 결론인 것 같습니다. 


37년 동안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국어 과목을 가르쳐 오신 김춘기 선생님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책을 시작하십니다(p155를 보면 수학과 미술도 담당하셨다고 합니다). 여성이라고 해도 선비 집안에서 고도의 교양과 학문을 익힌 분들이 계시며, 오래 전이라면 신사임당 같은 분이 그러하셨고, 이 책에서 회고되는 저자님의 자친이신 안현당 님이 또 그런 분이겠습니다. "한지를 펼쳐 먹을 갈아 초서로 사돈지를 막힘 없이 써내려 가셨고...(p17)" 상상이 가십니까? 지금은 성인 남성이라고 해도 초서는커녕 정자로 반듯반듯 쓴 행서체도 못 읽어 내려가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성장 환경과 양친의 훈육 원칙이라는 게 한 인간의 자질, 교양, 인격을 형성함에 있어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전여전이라고 김춘기 저자님 역시 그런 어머님의 훈육 밑에서 훌륭한 교육자로 평생을 봉직할 에너지원을 얻어 내신 거겠지요.


17세기 일본에 파견된 조선의 통신사들에게도, 일본인들이 그들의 명필을 한 폭이라도 받으려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하죠. 이 책에 나오는 안현당님의 작품 역시 동네 이웃들에게 그 비슷한 위상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분이라 해도,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여인네의 삶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반면 현대의 여성들은 (여전히 사회에 미흡한 부분이 매우 많긴 하나) 그분들에 비해서는 많은 기회를 부여 받고 있다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순과 불비함을 그저 탓하기만 하기보다,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선용하여 내가 세상을 먼저 바꾸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게 바람직할 듯합니다. 다소 일찍 어머님을 떠나 보내신 저자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비록 그 표현은 절제되었으나) 책을 통해 분위기가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황금기를 보냅니다. 한창 때의 여성이 활짝 짓는 웃음을 보면 아무 관계 없는 사람조차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듯 마음이 좋습니다. 어떤 여성이라 해도 늙음의 과정은 또한 피해갈 수 없으며 인생의 쇠락기(p40)에 대한 슬픈 자각은 주위에서 하나 둘 사라져가는 친구들 때문에 더 생생히 다가옵니다. "멀리 능선 사이로 황금기를 담아 짠 시간표가 무지개가 되어 행복의 다리를 놓고 있다(p41)."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저도 저자님의 연세가 될 즈음 이런 여유 있는 한 문장으로 생의 한 단계를 요약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피천득 선생은 수필을 청자연적에 비유했지만 나에게 수필은 조강지처이다(p57)." 이 말씀의 뜻은, 자신이 이미 갖고 있거나 주위에 두고 있는 게 얼마나 좋은 줄을 미처 모르고 계속 다른 곳만 두리번거리는 마음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합니다. p57에 보면 "시(詩) 공부"가 그 외도(?)에 해당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감히 수필을 차분하고 성숙한 장녀에 비유하자면, 발랄하고 상큼한 매력을 지닌 둘째 딸을 시(詩)에 비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 공부를 잘 마무리하시고 독자들에게 다른 장르의 멋진 작품을 선사하신다면 그런 멋진 다산(多産), 두길마보기를 어찌 남정네의 시앗치기처럼 비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아이를 많ㅇ이 낳아 애국"하신다는 표현은 p126에 (물론 다른 맥락으로) 나옵니다. 


"목련은 그 짧은 행복을 위해 긴 시간을 준비한 게 아쉽지 않을까(p79)." 그러나 정답은 이내 뒤에 나옵니다. 어찌 그 결과만 두고 모든 보람을 논하겠습니까. 진짜 행복은 그 준비 과정에 있으며, 과실은 그저 트로피요 덤일 뿐입니다. 인생의 득실을 그저 결과만 놓고 판단한다면 그야말로 정말 슬프고 허망한 일이 아닐지요. 


"엄마는 일일학습지가 하고싶어서 길에 떨어진 걸 줍기도 했어.(p105)" 이 문장에서 "엄마"는 저자의 따님이며, 지금 이 훈계를 듣는 이는 그 따님, 즉 저자분의 손녀입니다. 처녀 시절 열정적인 교사였던 분(p91)이 이제 할머니가 되어 딸의 훈계 장면을 보고 계시니 인생은 실로 찰나입니다. 우리 한국은 저처럼 이른 시절에도 이미 일일학습지가 교육상품으로 나와 인기를 끌었으니 정말 교육열이 강한 나라라는 점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뭐 촌스러운 일일학습지보다 훨씬 강한 tool들이 나와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지만 말입니다. "남편 사업이 무너지면서 살던 집까지 내놓아야했을 때 엄마의 가슴에 큰 못질을 했다(p151)." 이 구절을읽으면서 남성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배우자 직업으로 가장 선망되곤 하는 여교사를 아내로 두고서도 심지어 처가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막중한 책임을 진 남편의 일반적인 처지임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어 한숨이 나왔습니다. 물론 이 구절은 본디 딸로서 어머니께 충분한 효를 다하지 못한 저자의 회한을 표현했지만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자분의 고향이 고향이다 보니 수증릉으로 유명한 문무대왕암, 즉 죽어서도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일화 등이 책에 나옵니다. 저자님의 지적대로, 생전에 그토록 신실히 불교를 믿었다고 하면서 능 안에 그토록 많은 부장품을 껴묻은 행태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과 배치되는 바 아닌가 하는 말씀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코이라는 물고기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성장 정도와 모양이 크게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럼 나쁜 환경을 타고난 이들은 결국 제 잠재력을 다 발휘 못하는 게 운명일까요? 환경 역시 결국은 나의 노력에 따라 유리하게 바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환경 탓만 하는 사람은 어떤 유리한 조건이 주어져도 결국 무슨 핑계를 대며 목표를 달성 못 할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 역시 주변의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그의 잠재력을 돋워 주면, 그 역시 성공한 후 나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 상생과 화합의 기운이 이 사회에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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