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시대 -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계승범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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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일단 신하들에 의해 주도된 정변으로 옹립된 최초의 군주이며 그로 인해 적어도 집권 초반에는 대단히 불안정한 권력 기반만을 지녀야 했습니다. 이 불안정한 시기가 일찍 종식된 건 반정의 핵심이었던 박원종이 일찍 죽어서인데, 정치력은 미숙한 편이었던 그가 마치 12세기말 고려의 이의방, 정중부처럼 실권을 틀어쥐는 단계까지 못 갔던 건 조선 왕실을 위해 매우 운이 좋았다 하겠습니다. 


박원종이 죽은 후에도 조정의 주도권은 여전히 훈신들에게 있었습니다. 중종의 증조부였던 수양대군의 경우 본인이 거사의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신들이 큰 권력을 휘둘러 이후 근 3대를 지속했는데 하물며 수동적으로 옹립된 중종(진성대군) 같은 입장에서라면 더더욱 공신 세력의 입김 아래 놓이기 쉬웠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방책은 재야의 선비를 대거 등용하는 길이었습니다. 


사실 사림은 성종 재위기부터 널리 출사하기 시작했는데 그 조부가 의지했던 훈구세력을 젊은 군주(성종)가 통제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문제는 연산군이, 그 부왕과는 달리 이들 사림을 병적으로 배척했다는 사실인데, 원래대로라면 세조 이래 조정의 노른자를 독식해 온 훈구파에 숙청의 초점이 놓여야 정상이었겠으나 김일손의 사초 문제 때문에 반대 진영인 사림이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튼 이 왕은 절대 권력을 요구했던 터라 훈구 사림 가릴 것 없이 쓸려나갔던 건 분명합니다. 


중종은 정변을 통해 권좌에 올랐는데, 이 경우 중국에서는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으며 책봉을 안 해 주려 드는 게 보통입니다. 이때 반정의 핵심 중 하나였던 문신 성희안이 요령을 부려 명 조정을 속였고 그의 수완에 힘 입어 책봉 조서를 받아내고 맙니다. 이런 것도 당시로서는 권력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큰 절차 중 하나였는데, 한참 후 청에서 조선이 여전히 명의 숭정 연호를 쓰는 걸 들키지 않은 점도 그렇고 어쩌면 사정을 눈치 챘으면서도 fait accompli를 감안하여 모른척하고 넘어들 간 게 아닌지 싶기도 합니다. 


중종은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역대급으로 큰 실권을 휘둘렀던 문정왕후를 배우자로 둔 것을 비롯하여 두어 차례의 심각한 반란, 한 차례의 사화를 겪는 등 평탄하지 못한 재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리한 출발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로나마 체제를 안정시킨 그 공이 작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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