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크리스마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3
쥬느비에브 브리작 지음, 조현실 옮김 / 열림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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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에서 나온 "프랑스 여성작가" 시리즈 세번째 권입니다. 20년 전인 02년에 이미 초판이 나왔었고 지금 나오는 이 책들은 표지도 산뜻하게 바뀐 개정판들입니다. 앞의 두 권, 즉 아니 에르노와 마리 르도네의 장편들은 물론 걸작들이긴 하지만 분위기가 둘 다 너무도 어두웠는데, 이 작품은 그나마 좀 명랑해서 읽기에 덜 부담스러웠습니다. 


역자 후기에 보면 주인공이자 화자인 도서관 사서 누크에 대해 "예술가로서의 끼를 억지로 누르고 사는(p274)" 싱글맘(사실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만 사실 독자로서 저는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중에 이런 말은 있습니다. "아무튼 누크 언니는 전에도 무슨 일에든 다 부정적이건 게 기억나네요(p220)." 저는 오히려 이 말이 누크의 개성을 가장 잘 요약하는 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아주머니들도 워낙 감성들이 잘 계발되고 말솜씨들이 좋으셔서 수다를 듣다 보면 별의별 기발한 표현이 다 나오는데 이 소설 중의 누크보다 못할 바도 뭐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1990년대 중반에 나왔으며 작중 배경도 대개 같아 보입니다. 브래드 피트도 언급되고.... 여튼 혹 그렇다면, 한국 중년 여성의 대략 40%(물론 근거는 없습니다) 정도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이들이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이분들에게 어떤 제도적(?) 지원이 베풀어지면 참 좋을 텐데...


그걸 떠나서 누크(뿐 아니라 그 친구분들)의 수다는 듣기에 즐겁습니다. 친구들(마틸다, 니콜, 클로틸드, 웬디 등)도 장난 아니라서, 소설을 읽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습니다(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직접 확인들 해 보시면....). 모전자전인지 엄마인 누크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게 또 그 아들인 으제니오의 별난 감수성과 스타일입니다. 어느 나라나 택시 기사들의 언변은 못말리는 수준인데 그 중 한 분은 어린 으제니오한테 면박을 당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누크네는 그닥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도 않는데 이동 수단으로 별나게 택시를 고집하는 게 조금은 의아했는데 아니나다를까 p126에 니콜이 누크에게 한소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들 버릇 잘못 들이는 거라고 말입니다. "우리나라(프랑스)의 대중 교통 수준은 세계적인데.." 저는 이 대목을 읽기 전에 "프랑스는 택시비가 싼가?" 라고 잠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나라는 지구상에 없을 텐데. 


이 작품 속에는 적어도 한 마디는 하고 사라지는 택시 기사가 두 명인데 처음(p35 이하)에 나오는 사람이 꺼낸 보물 이야기는 아마도 누크에게 작업 거느라고 꺼낸 허풍이지 싶습니다(그러니, 으제니오가 눈치가 빨라서 그렇게 틈을 안 주고 받아친 거겠죠).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 심지어 처음 만나는 승객한테까지 경솔하게 보물 이야기를 하면서 주변에 누구한테 여태 안 했겠습니까.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명히 여성으로서 두터운 공감대를 형성하고 꽤 내밀한 사정까지 공유합니다. 책에 보면 "백마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을 만큼 여성들은 이제 깨어났다" 어쩌구 하는 대목이 있긴 하나 그렇다고 남자를 병적으로 적대하지는 않고 여전히 많은 남자들이 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원 또는 타원) 궤도를 도는 중입니다(타원은 초점이 두 개라는 점 잊지 마십시오). 심지어 이들 대부분이 전남편, 전남친, 현남친 등과 썩 성공적인 관계도 아니어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이 선사했거나 선사할 것으로 기대하는 쾌락에 대해서도 그녀들은 무척 솔직합니다. 하필 지독한 비호감의 상징으로("꼴보기 싫어 죽겠다") 국민배우 드빠르듀가 등장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살짝 짐작이 가능하기도 합니다(구체적으로는 이 독후감에 적지 않겠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속물적이며, 알고 보면 남들도 다 하고 사는 걸 마치 자신만의 고귀하고 유니크한 취향인 양 착각 혹은 포장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는 지나가는 듯 여러 애완, 아니 반려동물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을 비꼬는 멘트가 많습니다. 상당수는 자신의 여유롭고 착한 마음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동물을 기른다는 건데 여기 언급되는 약간은 충격적인 사연들을 보면 언뜻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직업인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지식을 모르는 이들이 있고,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자칭 전문가보다 더 잘 아는 아마추어도 있고. 이런 모습 역시 요즘의 한국 사정과 닮은 데가 많습니다. 


여튼 등장인물들이 다들 솔직하고 유쾌해서 좋았습니다. 우리말 제목도 그렇지만 "엄마의 크리스마스"라는 게 마치 주인공 혹은 화자가 아들 으제니오일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고 엄마 누크(와 살짝 주접스러운 그 친구분들)가 계속 이야기를 끌어 갑니다. 이미 1990년도에 맞춤법이 바뀌었는데도 (그 이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원작부터가 week-end라는 구식 철자를 쓰며, 한편으로 이미 영어가 세계어가 된 후라서인지 작품 중에도 영어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 대중 문화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chase a la mere는 "엄마를 쫓아다님" 정도의 뜻이겠네요. 영어가 확실히 프랑스어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언어인 게, 영어에도 (give) chase to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건 저 chase a의 직역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책에는 생의 이런저런 재미있는 진실, 혹은 그렇게 우리가 착각하는지도 모를 여러 믿음이 담겨 있어 또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누크는 "입이 큰 여자가 행복하다. 입의 크기에 자신의 복을 달고 태어난다"고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도안되는 소리 같아도, 환하게 큰 입을 벌리고 웃는, 혹은 초승달 같은 입술 모양을 최대한 크게 만들면서 미소 짓는 여인을 보면 그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고, 타인을 즐겁게 할 줄 아는 여인의 인생에 축복이 찾아오기 쉬운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인생의 철칙 같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리 믿으면 현실에서 결국 이뤄지기도 하겠으니.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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