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에서 한양까지 2 - 권력투쟁으로 본 조선 탄생기 개경에서 한양까지 2
이승한 지음 / 푸른역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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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 저자의 다른 책들에 대해서는 여태 23기 33주차, 또 22기 36주차에 리뷰한 적 있습니다. 이 책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다룹니다. 


조민수는 본디 명 정벌군을 편성함에 있어 이성계보다 상위 권한을 지닌 지휘관이었으나 이성계에 설득되어 위화도에서 함께 회군합니다. 이후 그는 이성계 측에 의해 실각하고 숙청되었는데 만약 위화도에서 그가 다른 스탠스를 취했더라면 군사정변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권력과 정쟁의 무정함, 무상함을 새삼 한탄하게 됩니다. 또 이는 이성계와 그 일파의 계획이 의외로 치밀히 준비되었겠음도 짐작게 하는 사실입니다. 


신종의 먼 후손인 공양왕은 폐가 입진의 명목으로 우왕 창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릅니다. 드라마 <태종 OOO>을 보면 이 군주가 생각 외로 만만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고 묘사되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망국 군주로서 고조선의 우거왕, 고구려의 보장왕, 백제의 의자왕, 신라의 경순왕 등과 함께 기억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공양왕은 간성왕이라고도 불렸는데 강원도 간성에 유배되었던 사실 때문입니다. 간성은 현재 강원도 고성군과 대략 일치합니다. 강원도, 그것도 영동 지방이라고 하면 교통도 불편한 오지라고만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한국사의 결정적 고비마다 그 나름 중요한 기능을 행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고성군의 북쪽에는 김화현이 자리하는데 이곳은 나말 여초에 금성이라 불렸고 한자로는 신라의 수도 금성과 표기가 같습니다. 즉 나말에는 한글로 금성이라 적힐 수 있는(아직 한글 창제는 안 되었으나) 지명이 세 곳이 있었던 셈입니다. 나머지 한 곳은 현 전남 나주인 금성으로서 이 한자 표기는 비단 금(錦)입니다. 이 역시 고려 태조가 둘째 부인을 위해 특별히 지어 주었다고도 하죠. 


저자는 공양왕의 경우 왜 양위가 아닌 폐위를 택했을까 하는 의문을 특별히 제기합니다.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는 구태여 선양의 "쇼"를 벌였고 이후 중국 남북조 여러 나라들도 찬탈시 비슷한 절차를 거쳤습니다. 한국은 비교적 왕조의 교체가 드문 편이었는데 신라 폐조의 경우에는 귀부의 형식을 취했죠. 왕조의 위신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시점에서 비로소 나라의 문을 닫은 경향이 있으며 이 때문에 과도한 명분 갖추기가 덜 필요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건, 여러 재해가 발생하자 민심을 일단 추스리기 위해 개경으로 도로 천도했던 방원은 이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계획 도시인 한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한양은 야심가인 삼봉 정도전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도읍이므로 방원의 재천도는 상당한 결심이 필요했겠다는 독자로서의 짐작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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