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의 재발견 -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500년 고려 역사를 만나다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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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고려사를 두고 "한반도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며 다양한 사상이 공존한 다원 사회"였다고 규정합니다. 


현재 KBS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OO 이O원>를 보면 이성계의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도 여전히 팔관회가 열린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팔관회가 대략 11월 즈음에 열렸고 위화도 회군이 그해(1388) 6월말경에 있었으므로 시기적으로 무리는 아닙니다. 이처럼 커다란 국가 변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관회가 국가적 후원을 업고 여전히 성황리에 열렸다는 건 재미있는 팩트입니다. 여튼 팔관회는 불교, 토속 신앙, 기타 외국의 영향을 입은 다양한 풍속이 한데 어울린 페스티벌이었으므로 고려의 다원적 성격을 증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 여전히 상업을 중시하던 고려 사회에서 경기 부양을 위한 중요한 장치 중 하나였음도 확인 가능합니다. 국민들의 사기 진작까지 도모했겠음은 당연합니다. 


보통 "공산 전투"라 불리는 팔공산 전투는 아직까지도 이와 관련한 수많은 지명이 현지에 남아 있을 만큼 후삼국 쟁패의 큰 분수령이 된 사건입니다. 고려는 영남 세력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가 아닌데도 이 지역에 왕건의 큰 고생을 기억하는 지명이 이처럼 많다는 건, 당시 영남 세력이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투쟁을 얼마나 숨죽이며 관찰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 왕실의 특징 중 하나로 근친혼을 꼽는데 이는 전조인 신라 왕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근친혼 자체를 선호한다거나 하는 성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왕실의 대통을 여타 가문에 쉽게 넘겨 주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는데 그나마 여의치 않아 경원 이씨 등 대성씨가 수시로 왕실의 권위를 넘보았습니다. 경원 이씨는 이자겸의 난이라는 큰 사건을 겪고도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는 가문으로 남았으나 명문 우봉 최씨는 4대 60년의 세도가 몰락한 후 흔적을 찾기도 쉽지 않을 만큼 몰락했습니다. 


저자는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삼긴 했으나 풍수지리, 낭가사상도 중시한 만큼 이 점에서도 다원주의 사회였음이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에도 한반도 곳곳에는 "부곡"이란 지명이 광범위하게 남았는데 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천민 집단이 거주하던 단위의 한 종류를 가리키던 일반명사였습니다. 그러나 부곡 출신으로 재상이 된 이도 있고, 특히 저자 박종기 박사는 부곡 연구로 학위를 획득한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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