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이 우리를 비껴가지 않는 이유 - 던져진 존재들을 위한 위로
민이언 지음, 제소정 그림 / 디페랑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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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인생 가는 길에 꽃잎만 좍 깔렸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불운, 이 불운이라는 불청객은 우리 갈 길에 시도때도없이 끼어듭니다. 끼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비껴가지를 않습니다. 말하자면 길막을 하고 아예 앞에 드러눕는 셈이죠. 일단, 왜 불운이 이러는지, 그 이유라도 알면 조금이나마 속이 시원합니다. 그 다음에 불운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방도가 없는지 차근차근 생각을 하고 행동에 나설 수 있을지 살펴 봐야되겠는데요...


서양에는 "바로워즈(빌리는 자들)"라는 자그마한 귀신이 있어서 우리 물건을 수시로 빌려간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뭘 좀 그렇게 찾으려 들면 죽어라고 눈에 안 띄다가 용무가 다 끝나면 나타나서 더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라버, 스틸러"가 아니라 "바로워"라고 이름을 붙였나 봅니다. 쓰고 나서 돌려는 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좀 다른 말을 합니다. p27을 보면 이런 귀신(?)이 설치는 이유는 평소에 우리가 불성실해서라는 겁니다. 평소에, 좀 평소에 우리가 물건을 체계 있게, 나중에도 기억이 잘 나게끔 정돈을 해 두면 그런 일이 벌어지질 않고, 또 나중에 큰 혼란, 불편이 빚어지는 건 이런 게으름, 불성실에다가 나비 효과가 덧붙여져 아예 수습이 안 될 만큼 커진다는 뜻입니다. 


노인분들은 참 당신들 이야기를 자주 하십니다. 한참을 자신 인생 역정 스토리를 털어 놓으시는데... 누가 보면 젊은이(대화 상대)가 먼저 뭘 물어 본 줄이나 착각하지만 사실 혼자서 그리 신 나게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와... 이 이야기 대체 언제 끝나나.... 저자 역시 헬스장에서 전직 수학 교사 한 분의 이야기를 그리 들어야 했습니다(p50). 그러던 어느날, 이분이 안 보이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이야기를 억지로 들어 주어야 할 때에는 그런 고역이 또 없었으나, 막상 어느 정도 정이 든 상태에서 갑자기 안 오시니 불안한 거죠. 우리 일상에서는 그리 달갑잖게 여겼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내 삶의 작은 일부가 되어버린 것들이 많습니다. 성가시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정을 붙여도 보고 작은 의의라도 부여하면, 또 모르죠, 생각지도 못한 진로를 틀어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렸을 때, 혹은 성인이 되어서도 거짓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세상이 그리 빈틈을 보이지 않으므로, 작은 이익을 얻거나 게으름 피우려고 거짓말 하다간 그 대가를 몇 배로 치를 수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정직이 바로 최상의 책략"이라는 게 괜히 있겠습니까. 원칙대로 고지식하게 밀고나가는 게 답입니다. 그런데 어려서, 혹은 나이가 들어서도, 거짓말 한 게 요행히 안 들키고 넘어가는 일(p88)이 종종 있죠. 이때 그 거짓말로 얻은 이익이 커서가 아니라, 안 들키고 넘어갔다는 그 작은 통쾌감이 길티 플레저로 남곤 합니다. 소소한, 그저 정직하게만 살아서는 맛보지 못한 쾌감.... 저는 이런 게 나중에 큰 사달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 저런 사람은 곁에 결코 둬서는 안 되겠다 싶은 인간은, 바로 요런 데서 남들보다 더 큰 쾌감을 느끼는 부류입니다. 얻는 것도 별로 없다, 아니 잃는 바가 훨씬 큰 데도 틈만 나면 일단 훔치고 봅니다. 훔치는 그 순간의 쾌감이 워낙 커서 나중에 제 인생이 어떻게 박살날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우리 영혼에 이런 작은 습관은, 그게 아무리 작은 습관이라도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바보라서 그런 소소한 도둑질을 눈치 못 채고, 저 사람 영 아니다 싶은 걸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모르는 척 해주는 건데 이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똑똑해서 남을 속여 넘겼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건 한순간입니다. 


야OO트는 아주 오래된 브랜드입니다. 판매방식도 독특한데 카트를 몰고 다니는 분들은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자영업자분들입니다. 우유 대리점하고도 비슷하지만 우유는 소매점에서 살 수 있는 반면 이 상품은 냉장 카트에서만 우리가 구입할 수 있는데 의외로 "음 항상 마주칠 수 있진 않아" 싶어서 마주칠 때마다 거리에서 구매하기도 합니다. 음... 여기서 저자는 어떤 철학(p112)을 발견하는데, 작은 용기에서만 마시는 게 감질이 나서 기냥 큰 용기에다가 따라 먹고 싶다... 저자님뿐 아니라 우리들 누구나 어렸을 때 한 번 정도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해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엔 어느 블리스 포인트라는 게 따로 있어서 그 임계점을 넘어가면 오히려 쾌감이 감소한다는 겁니다. 적정선에서 멈출 줄 아는 건 인생의 소중한 지혜 중 하나입니다. 한 페이지 뒤에 바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나옵니다. 


하우 아 유 제인? 파인 땡큐 앤드유? 주입식 교육의 폐해(p135)라고 지적되는 좋은 예이며 책에는 다른 예가 나오는데 아임 소리에 잇츠 오케이라고 답하는 대화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결례는 이쪽에서 했는데, 사과는 왜 저쪽에서 하는가?" 근데 뭐 이건, 일단 결례를 한 이쪽이 (결례를 했으니까) 먼저 사과를 하고, 또 저쪽은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하실 건 없었는데 과하게 사과를 받았으니 그 부분에 한해서 나도 사과를 한다, 뭐 이렇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럼 사과를 받고 "음 그래, 니가 니 잘못한 줄은 아는구나, 그게 기특해서 니 사과를 받아는 주고 넘어갈게." 뭐 이러는 건 더 아니지 않겠습니까? 


여튼 저자가 말하는 건 이게 포인트가 아니라 고백과 거절의 문제입니다. "관심으로 다가갔지만 이걸 그저 (단순한) 호의로만 받아들이고 작은 친절에 오해의 썰을 늘어놓기도 한다.(p134)" 여기서 전자는 먼저 말을 건 이의 큰 애정을 상대방은 그저 무심히만 여긴 경우이며, 후자는 딱 그 반대입니다. 난감하죠. "정중한 거절 역시 진심이니 누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미안합니다. -아뇨, 제가 죄송하죠"라는 대화에서, 처음의 "미안합니다"는, 고백했으나 거절 당한 사람이 하는 소리고, 뒤의 "죄송하다"는 그 거절한 사람이 정말 미안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둘 다 진심이다 이거죠. 그런데 이럴 것 같으면 둘 다 쿨하게 넘어가면 딱 좋겠으나 또 사람 감정이라는 게 아주 유치해서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좋은 약이라도 처방 받고 구간을 정해서 싹 잊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영어에 laconic이라는 말이 있는데 딱 할 말만 하고 마는 그런 스타일을 가리키는 형용사입니다. 책에서는 "심장을 도려내고 싶어요라는 말에 그러세요!라는 딱 한 마디 대꾸만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어서 저자는 헤밍웨이의 글쓰기 스타일을 논하는데 저런 걸 두고 하드보일드라고 불렀죠. 사실 헤밍웨이의 작품은 번잡한 수식이 없어서 고교, 아니 중학교 영어 교재로 쓰기에도 좋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간단한 말로 천 가지 심경을 함축하는 공력이 숨었지만 그런 재주는 십억에 한 명이 부릴까 말까한 천재의 영역이며 보통 사람이 어설프게 따라할 게 결코 아닙니다. "세월은 세월대로 야속하게 흘러가고 기억은 기억대로 질기게 들러붙는다(p156)." 아마 실연의 아픔을 겪어 본 이라면 책의 이 구절이 아주 절절하게 와 닿을 듯합니다. 


이 책은 민이언 작가님이 글을 쓰고 제소정 작가님의 그림이 중간중간에 나옵니다. 일러스트라기보다는 독립된 작품들을 적절한 여백에 소개하는 식인데 실제로도 작품을 찍은 사진에 가깝습니다. 제가 참 의외라고 여긴 건 pp. 218~219에 수록된 <곤죽산>이란 작품인데, 이 그림은 "시련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란 민 작가님 글과 함께 독자를 만납니다. "학창 시절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조산 운동..." 음... 곤죽산(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도 물론 조산운동의 산물이며 신생대 3기(요즘은 용어가 바뀌어 팔레오기 네오기로 나뉘었습니다만), 혹은 4기에 만들어진지라(그렇겠죠? 모르긴 해도) 아마도 나이가 많고 완만할 것입니다. "이미 그 압력들을 견뎌 내느라 높아지고 깊어졌을 테니" 어디 그뿐입니까. 풍화작용까지 다 겪어내느라 이제는 완만하고 조신하기까지 합니다. 그림을 보십시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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