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인목대비 - 역사야화소설
오영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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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기 2주차에 범우사르비아문고판 <계축일기, 인현왕후전>을 읽고 독후감을 쓴 적 있습니다. 그 두 작품은 서로 직접 연관이 없으나 궁중문학이라는 점, 작가가 여성으로 추측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습니다. 계축일기의 경우 아무리 폐주라고 하나 광해군을 "대전" 등으로 호칭하며 아무런 추가 존대가 없는 과감한 표현으로 일관하여 독자인 저는 흥미로웠습니다. 논자에 따라 저자를 인수대비 본인으로 추정하는 입장도 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교과서나 대중서에서는 광해군이 폭군이라며 축출된 이유로 "폐모살제"를 듭니다. 재미있는 게, 인목대비는 유폐되었을망정 궁내에 머무른 상태였고 공식적으로 "폐비"된 적은 없다는 점입니다. 또 광해군은 즉위한지 얼마되지도 않아 저 유폐 조치를 단행했고 따라서 인목대비는 아주 긴 기간, 광해군 재위기 거의 전부를 유폐 상태로 보냈다는 점이죠. 여기에 대한 찬성, 반대 입장의 차이 때문에 동인의 분당이 한층 고착화되었고, 광해군은 자신을 지지하는 대북의 정인홍, 이이첨 등 소수에 기대어 정치를 이끌어가야 했습니다. 또 이 과정에서 많은 옥사를 벌였고, 남인, 서인 등은 그저 파리목숨처럼 두려움에 떨었고, 이 때문에 코너에 몰린 서인 세력이 정변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점은 분명 폭군의 면모가 맞고 중종 반정의 발발 과정과도 무척 닮았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욱일승천하여 중원을 넘보던 만주 세력의 무서움을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옛 주인 명을 맹목적으로 섬기다 치욕을 당한 줄로만 우리는 압니다. 물론 위 문장은 그 자체로 틀린 구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을 보좌하여 정치를 주도하던 파벌인 대북 역시, 놀랍게도 숭명배금의 기조에는 전혀 서인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일부에서는 더 심한 경향마저 있었다는 점이 놀랍죠. 광해군과 북인이 기조를 같이한 대목은 "폐모"뿐이었던 겁니다. 


이른바 중립외교는 광해군과 극소수 측근만이 공감하던 정책이었으며, 사실 반정을 촉발한 결정적 실책은 폐모살제 같은 게 아니라 만주의 군주를 "한 전하"라 호칭한 외교 문서의 어느 표현이라는 지적도 귀 기울일 만합니다. "한"은 한이라고 쳐도 "전하"가 문제입니다. 조선은 사대교린 정책을 국초부터 유지했으므로 왜의 쇼군 등에 대해서는 전하라는 호칭이 종종 등장하는데, 왜보다도 등급이 낮은(?) 여진에 대해서까지 그 추장(...)에게 전하로 호칭함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거죠. 이는 사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바도 있으며, 여진에게 당당히 처신하는 건 논리필연적으로 숭명사대와 꼭 엮여야 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고루한 선비 상당수는 그 둘을 같은 것으로 보았겠지만 말입니다.


이후에 여진이 얼마나 강성해져서, 중국 오천년 역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강한 위신을 확립하고 강토도 넓혔는지는 그 한참 후의 사정일 뿐입니다. 안타까운 건 물론 많은 희생이 따랐겠으나 우리 자신의 자존을 지키고 오히려 명에 대해 큰소리를 치기 위해서라도, 당시의 여진, 아직 후금이나 청 등으로 발전 못했던 단계의 여진에 대해서는 국력을 잘 추스려서 한판 붙어볼 필요도 있지 않았었나 싶은 것입니다. 우리 실력으로, 당시 아직 크기 전의 여진을 좀 밟았으면, 당시로부터 수백 년 전 삼봉 정도전이 꿈꿨던 요동 경영 같은 걸 꿈꾸지 못할 바도 뭐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광해군이 현지의 정보를 냉철하게 수집하고 여진 내 친 조선파를 구별하여 공작도 벌이고 한 점은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우리가 그런 큰 수치를 당한 건, 중립외교다 실리주의다 사대주의다 이런 게 문제가 아니라, 군주와 집권층에 하필 불운하게도 사리 분별이 그냥 안되는 무능한 이들이 가득차 있었다는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려 초에도 주전 주화의 대립이 있었지만 일단 외적(거란)이 침입해 왔으면 지혜를 짜내 최대한 상대한테  타격도 주면서 막아내는 게 기본이었죠. 거란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무력을 자랑했는데 한번 혼이 나고 나서는 다시는 쳐들어올 생각을 못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아 그때 청나라한테 더 빨리 꿇었어야 했는데 같은 비굴한 후회를 할 게 아니라 그로부터 6백년 전 강감찬처럼 할 수 없었을지를 성찰해 보는 게 맞지 않을지. 또 이자겸 같은 자는 아구타의 금이 크게 일어나자 바로 사대의 대상을 바꾸고 평화를 유지했는데 이런 건 중립외교다 실리주의다 하면서 칭찬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ㅋ)는 게 또 특이하죠. 


인목대비는 그걸 떠나서 광헤군에게 그 긴 세월을 핍박받고, 언제 해코지를 당할 줄 모르는 불안한 상태로 인생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나아가 아들까지 잃었으니 그를 철천지원수로 여길 만합니다. 이는 그녀의 입장이고, 제3자로서 충분히 동정을 보낼 만합니다. 하지만 인목대비의 세계관이나 철학을 국정 운영의 기본으로 삼았어야 한다, 이렇게까지 비약할 필요는 없겠죠. 이 소설은 그 여성의 절절한 심정도 잘 녹여내어 표현했고 우리 독자들은 그 점 역시 충분히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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