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허밍버드 클래식 M 6
브램 스토커 지음, 김하나 옮김 / 허밍버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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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30여년 전에 브램 스토커가 캐릭터로 빚어낸 드라큘라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미디어 포맷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납니다. 그러니 이 고전 문학 작품이야말로 진정 늙지도 죽지도 않은 "드라큘라스러운"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라큘라는 물론 영국의 문필가 브램 스토커가 (실존 인물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낸 캐릭터이지만 그 성격은 그닥 서유럽적이라기보다 다분히 동양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도 신출내기 변호사 조너선 하커가 처음 트란실바니아 땅에 들어설 때 서양을 떠나 동양에 들어선 느낌(p11)이라는 말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p80에는 멋진 말이 하나 나오는데, "현대성만으로 소멸시킬 수 없는 구시대의 힘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확실히,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자 작품 자체가 창작된 시대의 특성 때문인지, 현대 문명의 이기라고 할 만한 요소가 자주 언급됩니다. p55에는 코닥 사진기가 등장하고, p223에는 손으로 적는 편지, 일기뿐 아니라 녹음 포맷이 언급되죠. p306의 축음기 납관, p330, p340, p475, p674 등에서 계속 언급되는 건 "녹음"입니다. p473에는 런던의 지하철도 나오는데 역주(각주 형식)를 통해 이 시기의 열차는 증기기관차였다는 설명을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p404에는 패딩턴 역에 대한 언급이 있고, p413에는 올드 파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1980년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저렴이(ㅋ) 위스키 중에 그랜드 올드 파라는 브랜드가 있었습니다. 


 

드라큘라의 용모는 어떠할까요? 흡혈귀(그에게 물린 피해자들 포함)은 자주 용모, 인상이 바뀐다는 게 특징인데 정상적인 사람인 척 할 때에는 아주 품위 있고 우아하지만 일단 그 악마 같은 영혼이 튀어나왔다 하면 그 사악함이 누구라도 벌벌 떨게 할 만큼입니다. p37에는 "백작"의 손을 강철 바이스에 비유하기도 하며, p44에는 "그의 손은 희고 고왔다"고 하는데, 그게 순간순간 달라지기라도 하는지 바로 다음 문장에는 "잡역부의 손처럼" 손가락이 짧고 손 모양이 뭉툭했다는 묘사도 있습니다. 귀신(?)에 홀리면 우리 인간의 지각은 오락가락하기 마련인지 p113에는 "내려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처럼,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몰라하며 헷갈리는 조너선 하커의 당황한 모습이 생생합니다. p43에는 눈썹이 짙어 미간을 가린다는, 늑대인간 등에 대한 아주 전형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영화 <반 헬싱>에서는 두 캐릭터가 동맹을 이루죠. 

 

드라큘라의 성격과 특징에 대한 묘사는... 음 일단 젊고 경황이 없는 조너선 하커의 증언은 사실 크게 믿을 수 없죠. 꿩 잡는 게 매라고 드라큘라 때려잡는(?) 전문가인 우리 반 헬싱 교수님이 하는 설명이 믿을 만합니다. "그는 오래 살았을 뿐 아니라(p415)" "아는 것도 많다(p511)"며 반 헬싱 교수는 드라큘라에 대해 극도의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p520, p647, p685 등에서는 원래는 인격자에 가까운 게 드라큘라 백작이라며 숙적의 장점에 대해서도 잘 파악합니다. 그래서인지 2014년작 루크 에반스 주연 영화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에 보면 이 캐릭터가 대단히 영웅적으로 묘사됩니다. 원전에 이런 (짧은) 근거가 있으니 영화도 그런 컨셉을 잡고 일종의 프리퀄을 만들 수 있는 거죠. 책 p747에는 "악마의 영리함"을 환기하는 선장의 말(비명?)이 나옵니다.

 

드라큘라의 지난 내력에 대해 본인은 엄청 자부심이 강합니다. p13에 제켈리 족에 대한 설명이 처음 나오고 드라큘라 백작은 헝가리인도, 왈라키아 인도, 작센 인도 아닌 이 제켈리 인이라는 설정이 p65에 자신의 입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니 백작이 루마니아인이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리라는 우리의 선입견은 이 원전을 읽으며 여지없이 깨지는 셈입니다. 제켈리 인은 대체로 투르크 족의 먼 방계로 알려졌는데, 백작은 정작 오스만 투르크와의 기나긴 항쟁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제켈리는 제켈리일 뿐 다른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겁니다. 제켈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인터넷에 "세케이"를 키워드로 관련 정보를 검색해 보십시오. 

 

p15, p105에는 슬로바키아인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약간 혐오감이 풍깁니다. p758에는 이런 일에 적합하다며 다시 한 번 해당 인종을 비하하는 듯한 대목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커를 배신하고 곤경에 빠뜨리는, 드라큘라 백작의 주구로서 스거니 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집시의 일족입니다. p462에는 노스페라투라는 현지어(흡혈귀라는 뜻)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p53에는 "하커 조나선"이라며 우리식(제켈리식?)으로 성을 먼저 말한 것에 대해 백작이 사과하는 장면이 있는데, 유럽에서 현재 성 먼저 이름 나중 식으로 관습이 정해진 나라는 헝가리와 핀란드뿐입니다. 그럼 저건 백작이 헝가리계라는 뜻인가? 물론 그렇지 않고, 오히려 조금 뒤에는 "우리 제켈리인이 헝가리 왕조 해체에 기여했다"며 자랑하는 대목마저 나오죠. 다시 강조하지만 백작은 그저 제켈리 인의 정체성을 가졌을 뿐입니다. p65에는 백작이 마치 왕처럼 "우리"를 주어로 쓴다고 하는데 이른바 "존엄의 복수(plural)"이라는 용법입니다. 일개 보야르 주제에 말입니다. 

 

반 헬싱 교수님의 외모는 어떠할까요? 2004년작 영화 <반 헬싱>을 보면 타이틀 롤인 휴 잭맨은 훤칠하게 잘생긴 배우인데, 이 원전에 나온 묘사는 p391의 "보통 체구에 다부진 모습" 정도입니다. 나이는 들었고요. 이는 여주인 미나 시선에서 본 것입니다. 반 헬싱의 등장 자체는 p241에서가 처음입니다. 

 

p417에서 반 헬싱이 명언을 하나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무작정 선입견을 갖고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이 드라큘라 수수께끼는 영원히 해결 못하고 런던에서는 피해자가 속출했겠지요. p234에는 실존 인물 디즈레일리의 명언 "예상치 못한 일은 종종 일어난다"가 인용됩니다. 

 

아무래도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가 좀 어려운 대목이 있었는데, 반 헬싱 교수가 p379에서 중혼자와 수혈을 두고 농담을 하는 대목 같은 게 그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다니... p464에서는 순수한 호의에서(?), 죽은이의 약혼자였던 이를 지목했다고 하는데 과연 애인의 가슴에 말뚝을 박게 시키는 게 (물론 죽지 않고 떠도는 흡혈귀의 운명으로부터 구해 주려는 의도라 하지만) 무리가 없는 요청이겠습니까? p798에는 "루시한테 그런 짓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생판 모르는 여인들에게 또 하자니..."라며 머뭇거리는 대목이 있는데 역시 잘 이해가 안 되는 심리입니다. 19세기 말 영국인과 현대 한국인의 정서 차이라고 여겨야겠죠. 재미있게도 p134에는 조선(코리아)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p373에는 미국이란 나라가 앞으로 강대국이 될 것"을 예견(?)하기도 합니다. 하긴 이는 심지어 구한말 개화파 지식인들도 다 하던 말이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떤... 십자가의 사용이라든가, 성체 반죽이라든가 하는 걸 보면 종교적 상징과 이 고전의 태도가 밀접하게 관련되었지만, 그렇다고 종교적인 성격은 물론 아닙니다. p19를 비롯 묵주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p172, p64 등), 처음에 조너선 하커는 "성공회 신도로서" 우상숭배가 아닐까 하여 꺼려졌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성공회 신자들도 묵주를 쓰긴 하는데 십자고상이 없죠. 

 

이어서 하커가 묵은 트랜실바니아 현지 호텔 여주인이 "오늘은 조지 성인의 날"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장면이 있는데. 성 조지는 원래 잉글랜드, 즉 하커의 고국에서 수호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입니다. p748에는 "웃기지도 않는 미신"이란 말이 나오고, p775에는 "미신에 과하게 의존"한다는 평가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로마 가톨릭, 혹은 정교회적 상징은 모두 미신과 어느 정도 연관을 맺고 기능하는 셈입니다. p273에는 동풍이 불길한 상징이라는 역주가 있는데 BBC 드라마 <셜록>에도 똑같은 설정이 있죠. 

 

이 소설에서 가장 매혹적인(혹은, 무서운) 대목 중의 하나는 하커가 처음 백작의 영지에 발을 디디는 장면이겠습니다. p26, p31 등에는 "개들이 얼마나 사나운데요"라며 마부가 하커를 극구 말리는 장면이 있죠. 우리도 어쩌다 저 남양주 같은 데 가면 개 사육장이 여럿 있는 걸 보는데 짖는 소리가 그악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물려 죽기도 했죠. p59에는 그 유명한, 거울에 비치지 않는 드라큘라 백작의 속성 언급이 나오며, p83에는 달빛을 등진 그림자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코폴라 감독의 1992년작 <드라큘라>에 보면 광인 렌필드(배우 탐 웨이츠가 연기)가 징그러우면서도 무섭게 묘사되는데 p505, p526등에서 그의 장황한 말이 외견상으로는 어떤 논리를 갖추고 이어집니다. 이것 관련 p81, p486 두 군데에서 <리어 왕> 중 광기와 길에 대한 대목이 (변형)인용됩니다(역주에 설명이 있습니다). 직접 관련은 없으나 p526에 <리어 왕>의 다른 구절이 인용되기도 합니다. p538에서는 반 헬싱 교수를 만나서 영광이라며 또 길게 이야기합니다. p222에서는 마치 재소자들이 한니발 렉터 박사를 섬기듯 "주인님"이라며 드라큘라 백작을 모시는 태도가 나오네요. 

 

백작은 칼을 즐겨 쓰는데 이 칼은 쿠크리라고 불리며 드라큘라의 상징으로 유명합니다. p808에는 그에 대항하기 위해(?) 헬싱 교수 일행이 지니는 무기로서 보위 나이프가 나오는데 이건 우리가 아는 이른바 람보 나이프와 같은 겁니다. 역주에서 "부이"라는 서부 시대의 인물에서 유래했다고 설명이 나오는데 존 웨인 주연의 고전 서부영화 <알라모>에도 이 칼과 해당 인물이 언급됩니다. p721에는 전투 종족으로 유명한 구르카 족(현재의 네팔 인)의 나이프도 잠시 언급됩니다. 

 

p54에 청년 변호사 하커가 백작과 카팍스라는 부동산의 처리를 논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카팍스는 한참 뒤 p561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작가 브램 스토커는 법률에 대단히 박식한 면모를 이 소설 여러 군데에서 보여 줍니다. 거의 과시한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p70에는 복(復)대리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공인중개사 때문에 민법 공부해 본 분 정도만 되어도 들어 본 적 있을 겁니다. 제가 원문을 찾아 보니 "agency one for the other"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p357에도 상속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p708에는 "재산 병합"이란 말이 나오던데 이건 원어가 hotch-pot이었습니다. p733에는 범죄학자로 유명한 롬브로소의 이름이 나옵니다. p174에는 "양도불능소유권에 대한 법규 위반"이라고 해서 대체 뭘까 하고 원문을 찾아 봤습니다. mortmain에 대한 설명이던데, 꽤 어려운 내용인데도 번역에서 알기 쉽게 매끄럽게 처리했다는 느낌이들더군요. 

 

번역이 참 좋아서 잘 읽히는데 p381의 역주에도 나오지만 유아어 bloofer를 "암다운"으로 처리한 건 멋졌습니다. p71에는 "거절은 사양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원어는 take no refusal이었습니다. 역주는 원문에서 저지른 작가의 날짜 오기를 일일이 짚는데 p232, p45, p587, p677 등 모두 네 군데입니다. p231에는 "추추신"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원문에도 pps라고 되어 있습니다. p118에서는 어떤 대목에 띄어쓰기를 일부러 쓰지 않아 효과를 내며, p627에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다고 해서 제가 원문을 찾아보기까지 했습니다. 

 

이 고전은 등장인물들의 편지, 일기 형식으로 시작하며 대부분이 서간과 저널 형식으로 구성되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그런 형식의 효과는, 악마인 드라큘라 백작의 실체에 대해 서서히 그 정체를 (객관적으로) 밝혀가는 재미를 더하는 것이죠. 독자로서는 천천히 읽어가면서 등장인물들의 주관적 관찰들을 통해 진상을 스스로 구성해 나가는 이지적인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막판 드라큘라와의 대결전 과정도 박진감 최고이며, 고전은 이래서 과연 고전이라는 점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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