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전사, 마법사, 연인 -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을 위한 심리 수업
로버트 무어.더글러스 질레트 지음, 이선화 옮김 / 파람북 / 202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로버트 무어와 더글러스 질레트의 전설적인 명저인데 드디어 우리말로 된 책으로 읽게 되어 너무도 기뻤습니다. 부제로는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을 위한 심리 수업"이라고 표지에 나오는데 이 역시 매우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멋진 규정입니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선물을 가져다 주는 노인을 두고 산타 할아버지. 혹은 산타 클로스라고 부르는 나라는 미국이나 한국 정도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 할아버지" 정도로 부르지요. 아무튼 신성한 날의 신성한 탄생, 신성한 아이에 대한 어떤 원형적 심상은 종교나 문화를 떠나서 세계 남성 일반이 공유합니다. 구유에 모셔진 신성한 아이에 대해서는 종교 불문하고 외경심을 가집니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참으로 멋진 해석을 합니다.

폰틀로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지난 세기까지 널리 쓰였으며 구태여 프랜시스 버넷 여사의 소년 소설에 주인공의 것으로만 채용되는 건 아닙니다. 또 그 이름이 딱히 고귀한 태생을 암시하지도 않습니다만 여튼 그 소설 덕분에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저자는 "아기 의자 폭군"이라는 원형을 도출합니다. 앞서 말한 "신성한 아이"나 이것이나 미성숙한 남성을 옹호하는 출발점 격인 이미지가 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ㅎㅎ 폰틀로이 이야기, 즉 소공자 이야기가 그저 상투적 해피 엔딩, 신분 상승 패턴 외에도 (미성숙한ㅋ) 남성들에게 어떤 쾌감을 주는 건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웅은 소년을 한계에 부딪히도록 하며, 불가능해 보이지만 도전할 용기가 있다면 실현 가능한 꿈을 꾸게 한다(p76)." "영웅의 죽음은 소년 심리와 소년기의 죽음이다(p77)." 영웅의 원형에는 양극단이 있고, 그 중에는 비겁자의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톰 크루즈는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소년 같은 이미지로 영상물에서 비춰지는지도 모릅니다.

근대 서양 문명이 타 문명과 단호히 구별되는 건 개별화입니다. 이와 반대로 동아시아는 어떤 모범적인 위인상에 개인이 동화, 수렴, 모방할 것을 권장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칼 융을 인용(p83)하며, "개별화, 개성화"가 사람들, 특히 남성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문제를 사회 탓으로 돌리는 건 마치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 나오는 불량 청소년들이나 보일 법한 못난 태도일 수 있다는 식입니다.

"왕의 에너지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식력과 축복이다(p92)." 그래서 소년들은 불안감을 애써 누르고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애쓰지만, 그에는 어떤 왜곡된 자아상과 롤모델, 혹은 유치한 영웅심리가 깃듭니다. p128에 보면 유대 민족의 예를 드는데, 성경 속에 묘사된 유대인들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가 하면 매우 미숙한 충동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전투 민족이었습니다. 많은 소년들,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이 가진 자아상 중 하나가 바로 전사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이는 매우 왜곡되거나 무리한 방식으로 자아에 투영됩니다.

"전사는 많은 경우에 파괴자이기도 하다(p139)." 그래서 적절한 방식으로 중화되거나 여과되지 않은 전사상(像)은 많은 경우 소년들, 아니 미성숙한 남성 어른들에게 과도한 정신적 하중을 안깁니다. 엉뚱하게도 어린 소년들은 <스타워즈>를 보면서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나 한 솔로가 아닌 다스베이더에게 열광하기도 합니다(p144). 이런 소년들 중 상당수는 성장한 후 네오나치가 되지나 않을지 우려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 근거는 증오, 복수심 따위를 심리의 배후에 깔고 있다는 게 거의 확실시되어서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죠.

남성들이 빠져드는 원형에는 중독자 타입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너무 민감해서 조그마한 교란이나 질서 위반에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중독성과 예민함이 "연인의 그림자 원형(p205)"이란 키워드로 연결된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주장이며 독창적입니다.

"원형처럼 행동"하는 건 때로 무력하고 나약한 자신을 초월하여 위대한 그 무엇인가로 단번에 도약할 수 있다는 어떤 환각을 갖게 합니다. 머리가 좋지 않고, 교육이 부족하며, 빈곤하고, 자신 없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계만 발견하는 사람들이 어떤 환각처럼 원형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몸에 맞지 않는 큰 외투는 결국 입은 사람에게 무리만 가할 뿐입니다. 원형으로부터 영감이나 에너지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이를 넘어 집착하거나 과도한 투사, 동일시는 결국 당사자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칠 뿐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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