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개론
김갑동 지음 / 혜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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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경종 대에 전시과 체제를 정비했는데 이는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며(왕토 사상), 따라서 토호, 호족, 귀족, 대지주 등이 땅을 부쳐먹고 사는 백성에게 함부로 수취할 수 없다는 대원칙이 비로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통일신라 때만 해도 관료전 도입이 성덕왕때 이뤄졌으나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되었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이며, 이후의 세련된 고려 대 시스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문신 귀족 정치, 무신 통치, 친원 권문세족 등으로 지배 양상이 변했지만 여튼 원칙은 전시과였습니다. 대농장 겸병으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토지 소유 형태가 타락하자 신진 사대부가 나라를 뿌리에서부터 뒤집고 과전법을 선포하여 바로 역성혁명이 이뤄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와 왕실 성씨만 바뀐 게 아니라, 전시과가 과전 체제로 바뀐 것이기도 합니다.

고려는 특히 불교 신앙을 중시했습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대승불교는 호국 사상을 강조하기도 했고, 이미 삼국을 거치며 백성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은 불교 신앙을 통해 대민 지배 체제를 구축해야 통치가 한결 수월했으리라는 추측이 합리적입니다. 다만 고려 후기로 가면 무격, 성황 신앙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고 특이하게도 한반도에서는 이미 통일 신라 말기부터 무속과 혼합된 미륵 숭배 사상이 유행했는데 이는 정통파 불교의 시선에서 보면 석가모니 부처를 적대시하므로 이단입니다. 아마도 불교가 벌써부터 타락하여 기층 민중을 착취하는 도구로 변형한 게 큰 원인 중 하나일 텐데 이는 중세 유럽 로마 가톨릭도 예외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중학교 때 국사 시간에 교생 선생님(젊은 여성분)이 들려 준 왕규의 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참고서나 교과서에는 안 나오는 스토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왕규는 고려 혜종이 죽자 갑자기 난을 일으켰는데 혜종의 후원자였던 개국 공신 박술희와도 적대했고 이해할 수 없는 망동을 일으켜 고려 초기 정국을 혼란케 하다 왕식렴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나옵니다. 특히 광주원군(역시 왕건의 아들 중 하나)을 옹립하려 들었는데 자신이 외척으로서 확고한 권력을 막후에서 행사하려는 책동이었다고 말합니다만 이설이 많습니다. 왕실에서 거의 미친 듯 근친혼이 행해진 것도 이런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종 인종 대에 가서 이자겸 같은 강력한 외척이 또 등장한 건....

조선 대에는 초기에 강력한 왕권이 유지되었고 비교적 영명한 군주가 많이 나와 외척의 폐단이 억제되었으나 이후 소윤 윤원형과 문정왕후 같은 이가 또 출현했죠. 중기 이후에는 사림이 등장하여 대귀족과 훈구 세력, 외척의 득세를 억제했으나 영조, 정조 같은 만기친람형 군주 이후에는 다시 세도 가문이 대두하는 등 이 문제는 봉건 체제에서 좀처럼 해법이 안 나오는 난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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