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1
제인 오스틴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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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보람은, 아무리 시대가 많이 지난 후에 읽어도 그 위대한 통찰이라든가 심오한 철학, 여전히 유효한 지혜, 아름다운 표현, 그 표현에 걸맞게 담긴 불멸의 진리, 신랄하면서도 이지적인 유머 등이 현대의 독자한테 고스란히 와 닿은 데에 있습니다. 고전은 그래서 고전이라고 불리는 거죠.

<오만과 편견>은 내용을 직접 읽지 않고 제목만 들었을 때는 무슨 내용이나 분위기일지 우리 현대의 독자들이 감 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영화판을 이 원작 소설보다 먼저 읽었다면, 물론 스토리 자체가 워낙 재미있다 보니 충분히 즐길 수 있었겠지만, 소설 원작을 먼저 읽은 독자보다는 감흥의 큰 부분을 빼앗긴(빼앗길?) 셈이라서 좀 안된 셈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솜씨가 서툰 감독이라도 일단 가독성 있는 영상으로 옮길 수는 있겠지만, 소설 안에 깨알같이 녹아 있는 유머와 위트, 반어, 지적인 멋 등을 남김 없이 담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그저 통속적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에게는 그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히며, 반면 그 이상을 추구하는 독자에게는 작가의 놀라운 설계와 솜씨가 또 눈에 보이기에 아주 다층적인 구조를 지녔다고 하겠습니다. 번역가 박용수님의 쉽고 자연스러운 번역도 좋았고 말입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소설은 베넷 부부의 일상적인 대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무 정보나 단서 없이, 혹은 "편견" 없이 이 부분을 읽은 독자라면, 왜 이 남편분(뒤에도 나오지만 분명 신사이신데)은 아내에게 이처럼 퉁명스럽게 대할까 라며 아쉬운 느낌이 들 겁니다. 또 아내 베넷 여사가 딸 리지(엘리자베스)에게 경솔하고 헐한 평가를 하는 대목도 의아스럽겠지만, 어머니만큼 딸을 누가 더 잘 알까 싶어 일단은 그냥 넘어갈 겁니다(혹은 그저, 가족 간의 허물없는 대화로도 읽힙니다). 그러나 소설을 끝까지 읽다 보면, 초기의 "편견"이 이처럼이나 뜻밖의 양상으로 깨질 수도 있구나 싶을 겁니다.

p23에는 베넷 여사의 수다가 나오는데, 다른 집 딸내미들에게는 꼬박꼬박 "양"이란 접미사를 붙이면서 유독 샬럿에게는 자기 딸처럼 무람없이 호칭합니다. 이는 그만큼 샬럿을 딸처럼 친하게 여겨서인데 이것은 소설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확인 가능합니다. 어찌 보면 샬럿은 소설 속에서 참 한심하게 보이는 면도 있는데, p168에서 드러나듯 아무 매력도 없고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이는(실제로도 그런) 콜린스에게 사실상 "취집"을 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p226에는 "(샬럿이) 캐서린 여사를 맞으며 두려움 때문에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라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독자는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해 주는 설명 같지만, 사실 이는 엘리자베스가 철저히 자신의 주관을 투영하여 행하는 진술이기 때문이죠. p106에는 콜린스가 로싱스 저택의 위용을 찬양하는 장면에서, 콜린스의 그런 말을 듣고 베넷 가문의 모든 식구들(엘리자베스만 제외)은 "로싱스 저택의 하인방에 비교되는 것조차 영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문장이 또한 너무도 우습습니다. 이 역시 엘리자베스의 신랄한 풍자입니다.

p96을 보면 캐서린 드 버그 노부인 역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경외할망정 결코 호감을 가질 타입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는 젊고 매력적인 부자 다씨(사실상 남주)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과 닮은 데가 있는데, 그러나 소설 후반에 드러나듯 평판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 각각의 실체는 서로 크게 차이가 납니다. 여튼 이렇게 평이 안 좋은 드 버그 노부인에 대해 유독 콜린스만은 열렬한 어조로 찬양을 늘어놓는데 이 사람은 억압적 부친에게서 훈육된 탓인지 어떤 자연스러운 감정의 생성과 표현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p100에 보면 콜린스에 "자만, 비굴함, 자부심, 겸손 등이 혼합된 인격"이라는 엘리자베스의 평이 나옵니다. 물론 가상의 인물입니다만 이처럼 재미있으면서도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는 인간형 분석이야말로 이 고전의 최고 매력입니다. 엘리자베스는 p64 등에서 자칭타칭 "인간 분석 전문가"로 나타나는데(특히 다씨가 이런 의외의 점을 발견하고 놀라곤 하죠) 이 소설의 최고 매력 포인트입니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신도 천재도 아니고 그저 평균적인 또래 아가씨들보다 훨씬 더 센스 있고 영리한 정도라서 실수라든가 착각, 혹은 "편견"의 함정에 자주 빠지지만 그 역시 우리 구경하는 독자들에게는 큰 재미를 줍니다.

콜린스는 참 어느 대목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p94에서는 본의 아니게 베넷 씨와 그 집안분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장황하게(15분 동안) 변명을 하며 이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시니컬한 시선이 잘 드러납니다. 반면 p404에서는 리디아의 가출에 대해 참으로 냉혹한 충고(냉혹함이 뭔지도 이해 못 할 사람이긴 하지만)를 하고, p496에서는 드 버그 노부인의 "노예" 답게 그 사주를 받아 되지도않은 논리로 반 협박성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물론 이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그 의미를 이해할 주제도 못 됩니다만).

이런 어리석은 콜린스이고, 게다가 (실정법의 맹점 때문에) 자신이 죽고 나면 모든 재산을 이 작자(조카)한테 물려주어야 할 베넷 씨이지만, 이상하게도 서신 등을 교환하며 소통하는 건 또 은근 즐기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3부에 본격적으로 나오지만 자신의 막내딸(리디아)이 저지른 그 멍청하고 무모한 선택에 대해 콜린스가 그 나름 충고랍시고 하는 말 따위에, 이상하게도 이성적인 타당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콜린스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이게 무슨 존경을 받을 만한 통찰 같은 건 전혀 아니지만, 여튼 결과가 그렇게 나오기도 하니 신기하기는 합니다.

베넷 씨가 콜린스를 좋아하냐 하면 그건 또 전혀 아닙니다. 장래가 이미 보장되었고 베넷 가문의 재산까지 차지할 수도 있는 콜린스를 사윗감으로 맞이하는 일에 대해 베넷 부인은 적극 찬성하며 둘째딸 엘리자베스더러 "안 받아들일 거면 연을 끊는다"고까지 했지만, 그 남편인 베넷 씨는 오히려 딸이 저런 작자를 남편으로 고르면 딸과 연을 끊는다고까지 합니다. 물론 베넷 씨는 짖궂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농담을 자주 하므로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콜린스에 대한 평가는 p168에서 "천성적으로 우둔함을 타고났다"든가, p188에서 "거만하고 속 좁고 우둔"하다는 말 등이 나옵니다.

이런 베넷 씨이지만 엘리자베스 눈에는 부친이 또 그리 완벽해 보이기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조금만 "처신"을 잘했다면 딸들이 그리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는 않았으리라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고, 사태의 진상을 모르다가 딸이 지혜롭게 알아낸 바를 나중에서야 듣고 마음을 놓기도 하는 등, 신사(드 버그 노부인의 평가대로)이기는 하지만 뭔가 순진하고 맹한 구석도 없지 않습니다. p515에서는 딸의 선택을 두고 전혀 짐작을 못했는지 "너 그 사람을 미뭐하지 않았었니?"라며 놀라워합니다.

여튼 베넷 씨는 신사이고 지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보기에 자신의 부인, 또 둘째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네 딸들은 하나같이 무식하고 바보 같다(p12)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같은 남자로서 이해가 가는 면이 있습니다. 근데 재미있는 건, 사실상 이 소설의 화자는 엘리자베스나 다름 없는데 여성의 눈으로 이처럼 남자 심리를 잘 알고 남자 입장에서도 바라볼 줄 안다는 점이죠.

p59에서 다씨는 그 특유의 건방진 말투로 "여태 살면서 교양 있는 여성은 여섯 명밖에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듣는 사람들(특히 여성들)이 기분 나쁠망정 그는 이 순간 정직하게, 또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말을 한 겁니다. 즉 그는 허영이 없는 대신 오만함은 갖춘 건데, p32에서 메리가 한 말처럼 적어도 다씨 같은 사람에게 이 정도 프라이드는 악덕이 아닙니다. 이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편견"의 의미는 (물론 작중에서 사연과 인물 형상화를 통해 잘 드러나지만) 명시적으로 대화 중에 뭐라고 정의된 대목은 없는데, "오만"의 의미는 ("허영"과 대비하여) 여러 번 나옵니다. 예를 들면 p84 같은 곳입니다.

1부 중간쯤에 혜성처럼 나타난 캐릭터가 조지 위컴인데 이때만 해도 압도적인 매력을 갖춘 뉴페이스의 등장에 독자들이 큰 기대를 가졌건만 결과는... 엘리자베스는 그의 빼어난 외모에만 반한 건 아니었고 그 자상한 태도나 선량해 보이는 분위기에 끌린 것입니다만 그처럼 한심하고 이기적이며 무대책인 면모가 있었는지는 몰랐겠죠. "인간 분석 전문가"이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한계일 듯도 싶습니다. p288에 "판단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라며 자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조지 위컴은 뭐 악인은 아니지만 3부 이하에서 보여주는 그의 면모는 사실상 인질범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노답 위컴을 용케 찾아내어, 생각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딜을 친" 외숙의 수완이 놀라운 줄 알았으나 정작 실무를 다 해치운 이는 따로 있었으니... p479에는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날 만큼, "최악의 지경에서 갑자기 최상의 국면으로 반전"된 베넷 가의 행로가 아주 보기 좋게 마무리가 되죠. p395에 나오는 말대로 "여자의 평판은, 아름다움만큼이나 깨지기 쉬운 것"인데도요.

이 소설에서 가장 중심적인 사건은 물론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관계 발전입니다. 2부 펨벌리 저택 장면에서 다씨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매너로 엘리자베스와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데 그 이유가 p364에 나옵니다. p425의 엘리자베스가 하는 말에서, 젊은이들은 과연 어떤 상대와 맺어져야 하는가, 물론 집안의 조건이나 외모, 재력 등도 당연히 따져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아주 신중하게 분석하는 대목이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합니다.

남성, 여성의 체격이나 키에 대해서도 소설 속에 자주 묘사가 나옵니다. p93에는 우리 선입견과는 달리 콜린스 씨가 키도 크고 몸집도 좋다는 말이 있죠. 또 p73에는 다씨가 그처럼 키가 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존중감이 반으로 줄어들었으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p58에 다씨의 여동생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p114에 처음 등장하는데 과연 듣던 대로 키가 크다는 게 확인됩니다. 그 이름이 "조지아나"라는 건 p163이 되어서야 나옵니다. 한편 다씨를 사윗감으로 점 찍었던 드 버그 노부인의 딸 이름은 "앤"이라는 게 p245에 나오죠.

여기서 독자들이 아주 밉살스러워할 만한 캐릭터는 당연 빙리의 여동생 캐롤라인일 텐데, 엘리자베스가 불구대천의 원수지만 사실은 엘리자베스는 비교적 여유를 갖고 상대를 다루며(p117) 반대로 수세에서 전전긍긍하는 쪽(p75, p131 등)은 캐롤라인입니다. 너무 밉게만 볼 건 아닌 게 베넷 가문과 이쪽 다씨 집안은 가격(家格), 재산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게 객관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가격 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 모친, 즉 베넷 여사의 출신과 그 식구들이 입에 오르내리는데(특히 3부 후반에 드 버그 노부인의 신랄한 모욕), 모친은 눈치도 없이 자기 생각만 하는 게 독자 입장에서는 참 밉더군요. 과연 그 남편이 "멍청하다"고 타박할 만하지 않습니까.

3부에서 큰 사고를 치고, 제멋대로인데다 예의도 없는(p175) 리디아는 여튼 그 모친이 가장 사랑하는(p67) 딸입니다. 반면 리지, 즉 엘리자베스는 엄마가 가장 싫어하죠(p142). 베넷 부인은 끝까지 사윗감들을 차별하는데 p458에서 엘리자베스는 그에 대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제인은 여기 나오는 여인들 중 그리 폄하되어야 할 인격은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설정되는데 다만 좀 둔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쿨병까지 걸렸기에 엘리자베스한테 여러 번 핀잔도 듣곤 하죠(p26, p469 등).

다씨는 아주 매력적이고 수완도 좋지만, 예를 들어 <바람과 함께...>의 캐릭터 레트 버틀러와는 또 결이 다릅니다. 후자는 본래 근본이 없는 출신이고 매너나 행동도 그에 맞게 상스럽습니다만 다씨는 정반대로 새침떼기처럼 세련되고 고상하죠. 드 버그 여사가 그처럼 중시하는 교육도 많이 받을 대로 받았기에 학식도 풍부하고 말입니다. 엘리자베스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행복한 커플이 될 것이라 우리 독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문제가 심각한 건, 자기 주제 파악 못하고 아무데나 함부로 감정 이입하는 바보들이겠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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