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서울셀렉션 시인선 1
류미야 지음 / 서울셀렉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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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류시화 시인 겸 번역가의 책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인생의 풍파를 두루 겪으면, 젊었을 때에는 채 알지 못하던 삶의 지혜가 어느덧 정신의 한 구석에 살포시 내려와 자리를 잡습니다. 파우스트는 늙어서 궁극의 지식에 도달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싱그러운 젊음에 대한 미련과 회오를 극복하지 못하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 소중한 영혼을 팔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건 왜 늦게 도착하곤 할까요? 음... 반대로,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왜 절정의 아름다움을, 아무것도 모를 인생의 초반기에만 신은 허용하는 것인가?"라며 한탄한 적 있습니다(공교롭게도 p78에는 "레미제라블"이란 제목의 시가 나오네요). 이런 경우는 아름다운 게 지나치게 일찍 도착했다가 일찍 떠나서 문제겠습니다만, 여튼 우리들에겐 "이 좋은 게, 좀 내 곁에 일찍 나타나 주었더라면..."라는 아쉬움이 언제나, 그것도 좀 늦은 나이에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무료하고 무의미했습니다만(?), 이 류미야 시인의 시집에 실린 열아홉번째 시 <몽상가 류보 씨의 일일>은 고독하고도 번잡하며, 답답하지만 치열한 분위기입니다. 몽상가들은 대개 집 밖을 안 나가는 게 보통입니다만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저 어디 건대입구 정도는 붐비는 어떤 대로를 걷는 듯합니다. 아니면 그 근방 어느 원룸 창을 통해 구경을 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제 몸 사라지는 꿈을 뜬눈으로 꾸면서 대로를 질주하는 닳아지는 살들이 백주의 교차로에서 연신 긋는 십자 성호(p32)"

보통 이런 풍경에 누가 참여하는 게 아니라 뭐 진짜 엿보기라도 하는 중이라면 대체로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늦은 밤이기 쉬운데 여튼 또 "백주"라고 시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닳아지는 살들"은 고 이호철 소설가의 작품 제목이라고 각주에 설명도 나옵니다. 만약 밤이었으면 욕망의 지침을 따라 부나비처럼 배회하는가 보다 여길 수도 있는데 낮이라고 하니 이는 각자의 사업에 골몰하여 어디로 부지런히 다니는 중이겠습니다. 그런데 성호를 연신 긋는다... 그게 진짜 사업이라고 해도 우리는 운수와 우연에 그 성패를 맡기는 경우가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냉혹한 계산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시나리오를 그려도, 마음 속으로는 한없이 약한 게 우리들입니다. 이러니 나중에는 "불면의 밤이 올(p33)" 수밖에요. 밤에 대한 멋진 시상은 저 뒤 p76 <그들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뭐가 과연 더 아름다운지는 예전 가수 코나한테 물어봐야 할 거 같습니다.

매력점은 빼지 않고 없는 걸 일부러 붙이고도 다닌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눈물점"은 여러 가지로 애매합니다. "누구는 빼라 하고 누구는 오른쪽 왼쪽 뜻도 다르다 한다"는데, 같은 사람에게서도 누구는 천치를 보고 누구는 죄인을 본다 하지만, 시인은 눈물을 예비해야 참된 생이라 여기는지 그대로 두려 합니다. 모반(母斑)은, 억지로 없애러 들면 그게 이미 모반(謀反)이 됩니다. 한 번 사는 생, 지상에 작은 기여라도 남기고 떠날 생각은 못할망정 순리, 천리에 대한 역심(p26)을 품어서야 어디 되겠습니까. 또, 눈물은 갈증에 대한 (정당한) 반역(같은 페이지)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머리를 매일 감죠. 더 긴 머리를 관리해야 하는 여성들의 경우 이는 "새벽의 의식(儀式.p13"이라 할 만합니다. "시리다"는 게 새벽이 시린 건지, 아니면 물을 끼얹고 때를 빼고 헹구는 그 과정이 시린 건지, 그도 아니면 가끔 눈에 들어가곤 하는 샴푸가 눈에 시린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행간 걸림?).

"너에게 세례를 주노니 (아아 그러나) 잘 더럽히는 나여(같은 페이지)"

매일처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날 태어나게 하는 건 거창하게 메시아를 초빙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이, 보람이 참 쉽게도 사라지죠. (내가 날) 잘 더렵혀서요.

누구는 "강철 같은 무지개"를 논했지만, 거친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고작 여리여리한 날개만 부여 받은 게 우리들입니다. "강철 돛을 매달기(p19)"란 언감생심입니다.

"사랑 속에 죽겠네, 이것은 나의 방식
그림자 죄 다 지우고
꿈속이듯 아니듯,(p19)"

마지막에서 두번째의 행 "죄 다"는 부사 "죄다"인지, 아니면 "죄(罪)(를) 다(entirely)"인지 모르겠습니다(띄어쓰기는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행의 "아니듯" 뒤에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찍혀 있는데 저는 처음에 눈이 침침해서, 혹은 저의 잠이 덜 깨서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이 시집에는 사실 마침표가 하나도 안 나오고, 아주 간혹 저렇게 쉼표가 보일 뿐입니다. 여튼 이 역시 감상자에겐 호접지몽의 경지(...라기엔 풋)

"불가촉의 기억 속으로 떠나버린
인도사과
사과가 사라지면서
어제도 다, 사라졌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인도가
난 그립다 (p55. <인도사과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전편)

여기서 기억은 뭐 불가촉이라곤 했어도 그저 멀어서 아득해서 (문자 그대로) 터치가 안 된다는 거지 보통 그 뒤에 살벌하게 따라붙는 "천민"의 뉘앙스와는 아무 관계 없을 겁니다(제 생각에는요). 그런데 우리는 왜, 자주 먹는 품종의 사과에다가 이웃 열도의 후지산 이름을 착각하여 갖다붙이곤 하는 걸까요? 괜히 입맛 찜찜해지게 말입니다. 후지사과와 부사산은 그야말로 전생에 아무 연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보무도 당당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하루의 바닥을 기다 녹초로 돌아온다
뒤집고 뒤집었지만
혁명은 어려웠다 (p63. <양말> 전편)"

막줄에서 "혁명은 어려웠다"고 내뱉는 양말의 말에서 대단한 오기와 허세가 느껴집니다. 정말 얘만큼 "잘 뒤집는, 뒤집히는" 팔자를 갖기도 어려운데, 그저 뒤집는(revolution) 게 혁명이라면 레닌이고 체 게바라고 간에 얘 앞에서 감히 발냄새도 풍길 수 없겠습니다.

"너를 말하기로는 이것이 좋겠네
무혈의 전사, 혹은
그림 없는 데칼코마니" (p89. <나비에게> 일부)

이 시를 읽고 저는 걸그룹 마마무가 떠올랐습니다. 뭐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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