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초병이 있는 겨울별장
박초이 지음 / 문이당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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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때문에 온 국민, 아니 전세계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고 감금 아닌 감금 생활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심각성을 아직 절감 못하고 규제의 눈길을 피해 이런저런 일탈도 저지르는지도 모르죠. 아니라면 그 많은 확진자(물론 억울하게 감염된 분들도 많지만)들이 어디서 병을 옮았겠습니까. 나 자신을 위해, 또 타인을 위해 좀 불편하더라도 지킬 걸 좀 지키고 살아야 하겠는데, 만약 질병의 확산세가 진정되지 않아서 공권력의 통제가 일상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뭐 이런 문제도 우리 상상 속에서 고민 못 할 바 없습니다.

절제된, 또 믿을 수 있는 공권력이 잘 통제만 한다면 다행인데, 어떤 국지적 상황에서 이를 악용한 개인이 나머지 위에 악의적으로 군림하려 들기라도 한다면? 또 이를 기화로 상호 불신, 증오, 폭력이 봇물 터지듯 나와 소통과 공존의 토대를 무너뜨린다면? 무엇보다 우리의 추악하고 잔인한 내면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외피를 깨고 나와 우리를 불편하게, 무섭게 응시한다면? 사실 마지막 이슈가 우리에게는 가장 공포스런 체험일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유리처럼 생겼다면 유리 같은 삶을 살지 않을 텐데(p63)" 영미 씨는 간호사인데 동료였던 유리를 몹시도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렸을 때 잘생기고 공부 잘하거나 운동 실력이 빼어난 친구를 동경하기도 하고 질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개 성년이 지나면서 정체감과 지향점을 어느 정도 설정하기 때문에 이런 감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영미 씨는 아직 젊지만 솔직히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상당히 미숙해 보입니다. 또, 유리 같은 삶이 대체 뭐 어떻단 이야깁니까? 사람은 모두 조건이 다르고, 남의 조건을 내게 비현실적으로 대입하며 가상의 삶을 상정하는 자체가 성인답지 못합니다.

유리 씨의 근황이 궁금한 그녀는 인터넷에다 검색을 해 보는데... 엉뚱하게도 "예쁜 여자", "여자 나체 사진" 등의 키워드를 시도합니다. 물론 동료와 함께 근무하며 어쩌다 그녀의 (아름다운) 나체를 볼 수도 있고 이후부터는 그녀 하면 대뜸 떠올리게 된 이미지가 그런 쪽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려면 인터넷 검색창에 저런 말을 쳐 본다고 당사자(의 정보)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영미 씨의 검색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으며,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할 만한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게 이 장편 후반부에서 드러납니다. p7의 "파곤에 절은"은 "피곤에 전"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리, 영미, 수연 등은 모두 간호인력인데 강원도 벽촌의 군부대를 업무차 방문하게 됩니다. 이들 말고도 김 기사, 관리팀장 최 등이 같은 팀인데 김 기사는 김 기사라고 쳐도 최 팀장은 언제나 이름이 생략된 채 "최"로만 불리거나 지시됩니다. p19에서 처음으로 소개될 때 "관리팀장 최", p21에서 "팀장 최", p78에서 "최 팀장"으로 불린 게 몇 안 되는 예외입니다.

김 기사가 운행하는 차량을 타고 군사 보호 시설 경내로 진입한 일행은 검문을 받습니다. 한국은 아직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 중이고 또 군사보호구역에서는 엄중한 조치에 따르는 게 맞으나 사실 이는 원칙일 뿐이며 실제로 민간인에 대해 FM대로의 통제가 매번 깐깐하게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p25 이하에서 이뤄지는 검문은 꽤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마치 적진에 잠입하는 미군 위장 부대가 처음 독일군을 만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 독자들은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당연하지만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는 인력들은 대개가 한창 때의 청년들입니다. "군인 아저씨"란 호칭이 자연스럽다면 어린이이거나 군복무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겠죠. 평균적인 남성 입장에서 군인은 비록 중무장 중이어도 얼굴을 보면 "어린애들"로 비칠 뿐입니다. 이런 애들한테 국방 의무를 맡기는 현실에 그저 미안해질 따름이죠. 여튼 정 일병은 한창 피가 끓는 청춘이라서인지, 남다른 미인인 유리를 보고 얼굴이 발그레해집니다. 물론 윗사람이 보면 군기가 빠졌다며 혼깨나 날 일인데, 우리 독자들은 여기서 또 불안해집니다. 뭔가 좋지 못한 일이 터질 것만 같은. p55에서 "찰라"는 "찰나"가 맞을 듯합니다.

"전 먹으러 갈까요?(p62)" 어느 동네건 녹두전이나 조개구이 등을 약간의 반주와 곁들여 파는 식당은 있기 마련입니다. 동네가 동네다 보니 젊은 군인들이 많고, 젊은 여성들을 보고는 합석을 청하는 제스처도 뭐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카뮈의 <페스트>의 한 장면 같은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상상만 해도, 내가 저 식당에 혹 있었다면 엄청 놀랐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는 사실 저런 증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옆에서 심한 기침 끝에 갑자기 의식을 잃는다면 역시 공포에 질릴 겁니다. 여기서부터는 마치 재난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발열체크와 문진표를 통해 유증상자는 검삭결과가 나올 때까지 격리할 것입니다(p90)." 증상도 없이 군부대 유관 시설에 격리된 여성 간호사들은 TV로 정부 당국자의 기자회견을 보고 있습니다. 저곳은 모두에게 오픈된 열린 세상이지만, 왠지 당국자가 불친절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기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영미 씨 등은 저 TV 너머나 자신들이 (사실상) 갇힌 여기나 별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는 듯합니다. 질병이 점령한 세상은 우리가 여태 누려 오던 자유의 부재, 박탈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강요하며, 동시에 수상쩍고 불길한 권위의 등장에 어느덧 비굴하게 적응하도록 재촉합니다.

젊은이답게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처구니없는 욕정을 못 누르는 박 상병 같은 녀석도 있습니다. 특히 박 상병은 어딘가 많이 모자란 사람 같습니다. 목적을 달성 못 하자 불과 몇 분만에 대상을 바꿔 수연에게 접근하는데, 멍청한 건지 아니면 어느 정도 즐기는 건지 분별 없이 박 상병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듯한 수연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네요.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보면 고립된 상황을 악용하여 현지인들 앞에서 신으로 군림하는 커츠대령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작품에서 대위가 그러합니다. 대위는 그저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는 현장 지휘관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 지금 새로이 들어선 질서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튈지 정확히 계산하는 맹수 같습니다. "우리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라고요!" 아무리 항변해 봐야 소용 없습니다. 대위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누구 하나가 명령 불복종의 대가로 죽어 나가도 어떤 주목도 못 받고 상황 논리에 묻힐 것이라고 합니다.

(이하 약간의 내용 누설에 주의하십시오)
앞에서 말한 팀장 최, 이름이 온전히 안 나올 때부터 뭔가 불길한 느낌을 주더니 기어이 죽습니다. 죽어도 그 경위조차 왜곡, 은폐 당한 채 억울한 죽음을 겪는데 전체주의 체제가 따로 없을 만큼 살벌하게 묻힙니다. 통제된 공간에서 현장 감독자는 반드시 가학적으로 타락할 유혹을 받는데, 대위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기나긴 임관 과정을 견뎠다는 듯 잔혹한 소 독재자로 전면에 등장합니다.

"딩동댕. 이번엔 두 사람이나 정답을 맞혔네. 영미와 수연."(p171)
대위는 새디스트 독재자일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열등감, 원한 등을 훤히 파악합니다. 정상의 도덕률이 지배할 때 차마 내놓지 못하던 못난 복수심을 이 기회에 마음껏 발휘하라고 부추깁니다. 유능한 독재자들이 발휘하는 선동 수완은 대부분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통제당하는 대중을 자신의 공범자로 만듭니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보면 평범한 양심을 가진 소시민이 어떤 과정으로 독재와 억압 기제에 순응하게 되는지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서술됩니다. 코로나 19 덕분에 통제와 갈등 사이의 본질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보게 된 우리들이, 방 안에 앉아 추위를 피하며 몰입할 수 있는 소설 같습니다. 약간 잔인한 묘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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