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열풍 : 남인수에서 임영웅까지
유차영 지음 / 행복에너지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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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강점기 비록 일본 엔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트로트는 수십 년 동안 한국의 민중과 함께했으며 엄연히 우리의 대중문화입니다. 작년 즈음부터 부쩍 트로트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요즘은 웬만한 채널마다 고정편성(혹은 재방송)하는 트로트 프로그램이 하나씩은 있던데 그 배경을 정확히 분석하기는 어려우나 여튼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아마 요즘 가요가 너무 젊은층 위주로 제작, 소비되다 보니 장노년층이 즐길 장르가 절실히 욕구된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 책은 강점기 말엽 정도로 거슬러올라가는 한국 트로트 역사를 거의 다 커버하고 있으나 저자의 풍부한 지식으로 각 구간의 대중문화사 중요 화제, 에피소드, 굵직한 사건 등을 두루 다룹니다. 그래서 나이 많이 자신 층, 세대가 읽으면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것 같고, 젊은 층이 읽어도 간혹 TV에 나오는 나이 드신 올드스타가 누구인지(누구였는지) 배우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사에는 가장 생생하고 선명한 민중의 애환이 배어 있기 마련입니다. 순전히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히겠습니다.

p92에 보면 "우리 정치사에서 대표적 라이벌이 박정희 & 김대중이었다면, 대중가요사에는 나훈아 & 남진이 용호상박이었다."라 말이 있습니다. 원문 그대로이며, 아마 나이 많으신 분들은 남진 선생을 먼저 거론하기도 할 겁니다. 젊었을 때에는 남진(이하 경칭은 생략)이 더 인기가 좋았으니 말입니다. 어떤 분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은 상상이 안 가지만) 지방 대도시 나이트클럽에 와서 뭐 테이블 위에도 올라가고 쇼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하죠. 나훈아씨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싱어송라이터로 변신했고 이후 대규모 콘서트가 큰 성공을 거둠에 따라 넘사벽 레벨로 올라섰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 전 추석 연휴에 전 국민의 화제가 된 방송 공연을 한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이 책에는 작곡가 임종수씨가 (진심) 불후의 명곡이라 할 <고향역>을 작곡하여 나훈아씨에게 준 에피소드(1972년)가 나옵니다. 저는 전혀 몰랐는데 임종수씨도 당시 정말 젊은 나이였네요. 나훈아씨는 당시 이미 스타였으므로 임종수씨(5년 연상인)가 "딱 5분만 시간을 내 주십시오"라고 부탁해서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작곡가가 당시라고 무조건 갑이었겠다는 선입견은 틀린 거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그 시대를 정말 몸으로 살아내고 다문(多聞)한 저자만이 들려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풍성하다는 겁니다.

193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 반도에서도 대중문화가 그 나름 무르익어서 다양한 스타들이 탄생합니다. 저는 처음 들어 보는데 황해도 박연 태생의 야인초라는 분에 대한 소개가 p46에 나옵니다. 여기서 부산 최초의 음반사인 코로나레코드사가 거론되네요. "코로나"라는 단어는 그때로부터 거의 90년이 지난 이제 웬만하면 상표 이름으로 쓰이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죠. 저자는 운치 그윽하게도, 고려가요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경별곡>의 가사를 풀어서 책 안에 함께 담기도 합니다. 저 무렵만 해도 대중문화의 무대, 배경, 소재는 반도 남북에 두루 미쳤음을 상기하면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p30에 보면 반야월 선생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게 풀어집니다. <울고넘는 박달재>라는 명곡은 1948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저자는 풍부한 상식을 바탕으로 가사 중에 등장하는 "천등산"이 고개가 아니라고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박재홍 선생에 대한 설명도 있는데 원래 이분은 강점기 시절 은행원이었다고 하네요. 제가 몇 달 전에 읽고 리뷰도 남겼던 <청년사업가... >라는 만화책에도 주인공이 은행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딛는 내용이 있죠. 반야월 작곡가는 (1980년대 후반 노래방 업종의 등장 덕에 뒤늦게 히트를 친) <소양강 처녀>도 지은 분이죠.

책은 참 내용이 풍성합니다. 예를 들면 가사에 나오는 박달재에 대해, 1217년 고려 고종 연간에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소탕했다는 말까지 담깁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역사상식까지 느니 얼마나 좋습니까? 아니, 1217년인데 그때도 거란이 남아 있었나? 천등산은 충북 제천 소재인데, 김취려 장군은 서북 지방에서 적군을 격퇴하지 않았던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말하는 거란군은 여진의 금나라에 복속되었던 잔당이고 자칭 대요수국 세력이었습니다. 그 한 무리가 멀리 남쪽까지 내려왔다가 소탕된 거죠. 트로트 책 읽으면서 국사까지 공부하게 되어 정말 좋습니다^^ 저는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노래 가사의 산이 "전등산'인 줄 알았습니다(TV 자막도 그리 나왔던 것 같은데....).

나이 지긋한 50대 장년층에선 <선녀와 나무꾼>이란 노래를 아는 분들이 많겠습니다. 이 노래가 이 책에 왜 나올까 생각했는데, 미스터트롯 본선에서 미스터붐박스가 불렀다고 하는군요. 저자께서 일일이 그 프로그램을 다 시청하고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 노래에 대한 사연을 풀어 놓는 게 너무 재미있습니다. 솔직히 저 세대분들이라고 해도 저 노래를 다 알 것 같지는 않은데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의미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김창남씨는 1980년대 후반에 인기를 끌었던 <달빛 창가에서>를 부른 "도시의 아이들" 듀오 중 한 분이죠. 안타깝게도 간암으로 타계했습니다. 책에 보면 "심기남"이라고 나오는데 "신"기남이 맞습니다. 예전에 DJ,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계자군 중 한 명으로 키우던 정치인들 중 한 명이죠. 천-신-정이라고. 지금은 저 세 분 모두 일선에서 쓸쓸히 퇴장했습니다. 여기에 설명이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에까지 화제를 이어가서, 그 근원이 금강산에 닿음을 논급합니다. 저자의 역량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유클리드의 원론>에 명시된 평행선을 음유하면 가슴은 더 아린다.(p369)" 와, 정말 트로트책이 맞나요? 제가 이런 구절들만 독후감에 인용하니까 내용이 어려운가 보다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책에 실린 모든 꼭지가 하나하나 다, 트로트 명곡에 대한 소회와 설명과 역사 이야기입니다. <평행선>이라니 사실 저는 모르는 노래인데, 이 책에 나온 설명을 읽고 나서 웹에서 검색을 따로 해 보게 되었습니다. 트로트라고 하면 젊은이들은 "다 그 노래가 그 노래" 같다며 주의깊게 듣지 않고 넘기지 않습니까? 그러던 게 빼어난 가창자를 만나 생명력을 새로 얻고, 이런 책의 멋진 설명이 입혀지고 나서 완전히 신선한 인문의 의미까지를 얻게 되는 겁니다. 최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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