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역사
자크 엘리제 르클뤼 지음, 정진국 옮김 / 파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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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산지 지형이 많은 편이며, 오히려 프랑스는 (특히 인근 스위스에 비해) 강을 낀 평지가 비교적 너르게 발달하여 농사에 유리한 국가로 잘 알려졌죠. 그래서인지 프랑스 인문학자, 사회 운동가가 쓴 "산(山) 예찬론"은 특별한 느낌으로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다가옵니다. 더군다나 한국 역시 비교적 최근에 민주화의 여정을 치렀고, 이 저자께서 활동할 당시 프랑스도 "파리 코뮨" 등 굵직굵직한 격변을 거치던 중이라서 교감의 지점이 더욱 넓어지는 듯합니다. 책날개에도 나와 있듯, 저자는 이 책을 가뜩이나 산이 가득한 스위스에서 일종의 망명 시절에 썼다고 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지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외롭다기보다는 자유로웠다." (p16)

"중간 지대"라 함은 물론 이 책의 제재, 주제인 산을 뜻하겠죠. 저자가 생각한 하늘과 땅은 그럼 각각 무엇을 상징하기에 하필, 새삼, 왜, 거기서만 자유로움을 느꼈을까요? 저자의 성향상 아마도 하늘은 (프랑스에서 지배적 종교였던) 기독교(가톨릭)의 숨막힐 듯한 도덕주의, 땅은 압제와 욕심, 비루함, 거짓 등을 각각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 동아시아인,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와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고려가요 <청산별곡> 같은 걸 보면 더 그렇죠.

이 저자보다 이백 년 정도 전 사람이고, 이성과 종교적 신심 사이에서 어지간히 갈등도 했던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을 나눈 적 있습니다. 이 책 저자는 "어린 시절 나는 산이 완전히 규칙적이고 똑같은 모습으로 뚝 떨어진 거대한 덩어리라고 생각했다(p18)."라든가, "자연은 잠시도 쉬지 않고, 높이 솟은 산의 모양을 계속 바꿔 놓았다(다음 페이지)."처럼, 산이란 지형의 불규칙성, 자의성, 임의성, 예측 불가성에 놀랍니다. 그리고 인위적 조형에서 전혀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찾아냅니다. 저 술회에서도 알 수 있듯 저자는 산지와 비교적 거리가 먼 곳에서 성장했으며 "산을 책으로만 배운" 사람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특히 산을 좋아하고 즐겨 찾는 세대, 유형이 어려서부터 산과 친밀했던 이들인 것과 크게 대조되죠.

"인간은 특이하게 비열하다. 산짐승 가운데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는 짐승들에 감탄하며 찬양한다."(p146)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서양 문학, 기록을 보면 유럽에서 멸종된 지 꽤 오래인 사자를, 구태여 다른 대륙에서까지 찾아 가며 그 생리와 난폭한 본능을 예찬합니다. 거의 어느 왕실의 문장에건, 잔뜩 성이 난 숫사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이 생각을 잠시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저자 역시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네요). 이는 힘, 무력, 지배하는 본능에 대한 예찬(혹은 굴종)이며, 영장류 중 어느 다른 종보다도 호전적인 인간(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 보일 법한 행태이긴 합니다.

"하지만 목동은 독수리(군주들이 좋아하는)를 미워한다.... 곰은 뼈를 씹어 먹을 만큼 힘이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왕들은 곰을 좋아하지 않는다. ... 반대로 민중은 곰의 성격을 소중히 여긴다... 곰은 용감하고 솔직하고 착하다! 곰은 새끼에게 다정하다.... 곰은 길들여져 사람 일을 도울 때 온순하게 모욕도 참아낸다.(하략)" (pp.146~148)

마지막 문장은 어떤 스위스 박물학자한테서 저자가 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서술엔 작가의 느낌, 세계관 등이 강하게 이입되어 있습니다만 우리 독자들도 뭐 대체로는 동의할 만한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말까지 나오는데... "차라리 곰을 길들여 우리와 함께 일하면서 살아남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동물관, 동물 보호 사상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무렵의 흔적이므로 독자들은 그 점 감안하며 읽어야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 다음 문단입니다.

"그런데 늑대는 어떨까? 비열하고 못된, 피비린내 나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데!... 모든 동물이 늑대를 미워하고, 늑대도 다른 동물들을 미워한다... 늑대는 약하고 상처입은 짐승만 공격한다.. 심지어 늑대가 사냥꾼 총에 쓰러져 숨을 헐떡일 때, 다른 늑대들은 그놈을 덮쳐 고기를 뜯는다.(하략)" (pp.148~149)

이게 정확한 박물학적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구절을, 이른바 "늑대정신"을 회사의 모토로 내세우는, 중국의 화웨이 사 직원들에게 들려 주면 어떨까요? 그들은 삼성전자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오늘도 열일한다고 하니.... 여튼 저자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피에 젖은 로마는 상상할 만한 모든 중죄의 기억을 늑대에게 떠넘겼다... 로마는 비열한 폭력과 무수한 파렴치 만행으로 고대의 왕이 되었다... 모든 죄악을 날조하면서 암늑대를 어머니 수호신으로 삼아 군림했다.(하략)" (p149)

마지막 문장은 로물루스와 레무스 신화를 염두에 둔 것이겠습니다. 이 책이 쓰여질 무렵 국가로서 통일 작업을 거의 완수한 이탈리아에 대한 적개심 같은 건 아니고, 당시 프랑스를 비롯하여 전 유럽에는 계급 간의 투쟁이 절정에 달했음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좌파 사상은 크게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로 갈라지는 중이었는데(물론 개량주의 스탠스인 이른바 사민주의 역시 이 무렵 확산을 거듭했죠), 저자는 이 중 아나키즘 계열이었죠. 그에게 있어 모든 압제, 폭력, 타락과 죄악의 근원은 로마 제국이었고, 이런 권력 혐오 사상이 저 문단에 잘 표현되었습니다.

우리 동아시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물론 산지 지형이 특히나 발달했습니다만, 그것 아니라도 이른바 자연친화, 청류 사상, 도가 같은 것이 하나 같이 인위와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역시 저자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루소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바 있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저 앞 페이지에서 저자는 특히 "곰"의 습성과 성향을 찬양하는데, 만약 한국의 단군 신화를 그에게 들려 주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p39에 보면, 본문은 아니고 각주에서 한국어 역자가 단군신화를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체 늑대와 산이 무슨 상관이냐?"고 불만을 토로할 수 있겠으나,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나옵니다. "산을 아끼는 사람에게는 늑대가 대평원의 짐승이어서 다행이었다.....(그러나) 늑대는 탄력에 넘치는 근육으로 바위를 뛰어넘어 다니기 좋게 적응했다. 프랑스 산악의 산양이나 영양처럼 진짜 산악동물이 되었다.(하략)"(p149)

저자는 늑대를 혐오한다기보다, 늑대에게서 엿볼 수 있는 인간의 비열한 속성과 사회성에 대한 경멸을 드러낸 거죠. 마치 주자가 표방한 "격물치지"의 응용을 엿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한 페이지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늑대는 순하고 사회적이다."(!)

아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ㅎㅎ 그러나 솔직히 우리 독자들은 이 구절에서 안심이 됩니다. 동물은 그저 동물일 뿐, 어떤 선하다 악하다 배울 만하다 같은 느낌은 우리 인간이 그에 부여하는 주관적 가치일 뿐입니다. 저자는 결국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을, 동물을 빌려 풍유했을 뿐 결국 동물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었던 겁니다. 저 앞, "곰 이야기"를 하면서 "차라리"라고 한 건, 늑대를 길들여 개를 만드는 대신 곰을 길들여 다른 동무를 옆에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겠죠. 이에는 인간이 걸어 온 지난 발자취에 대한 깊은 회한이 담겨 있는 겁니다. 마치, "고대 로마 아닌, 보다 인간적인 다른 공동체 단위가 그 자리를 채웠더라면?" 처럼 말이죠. 저 같으면 저자에게 인도의 굽타 제국 같은 걸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저자는 유려한 문장과 풍부한 상상력을 구사하지만, 본업이 인문학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책에는 온갖 지질학적 지식이 잘 녹아듭니다. 역시 산의 불규칙성에 감탄하는 문장인데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산에서는 비탈과 바위마다 (그) 나름의 독특한 면이 있다. 구성재와 퇴화 물질의 버티는 힘 때문이다. 퇴화하는 물질이 얼마나 오래가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이룬다.... 아무튼 산의 구성요소는 몇 가지 안 된다! 그것을 단순히 몇 가지 조합했는데도 놀랍도록 다양한 모습이다!" (p32)

이하에는 산을 구성하는 바위, 암석이 상당 부분 석영으로 구성되었다는 말, 석영이 규토라는 말, 따라서 산화규소라는 성분이 산 지형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말 등이 이어집니다. 이때 산화는 酸化이며, 산소(O2)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원소 관련이기도 하죠. 우리도 이미  중3 교육과정에서 "우리들이 사는 지구에서 가장 흔히 보는 건 규산염 광물"이란 걸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조면암, 현무암, 흑요석, 경석은 모두 규소, 알루미늄, 칼륨, 소듐, 칼슘이다."(p33)

"옛날에 서로 다른 온도의 층층이 겹친 대기층들은 지질학적 수평층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고산과 첨봉과 절벽은 구름에 휩싸이곤 하는데 지상으로 내려앉으려는 시꺼멓게 찌푸린 하늘 같다.... 산은 증기의 증감에 따라 멀거나 가까워 보인다."(p80)

그러니 이 무렵은 자연과학, 인문지리학, 지질학 등이 아직 서로 모순된 국면을 노출하며 복잡한 공존을 이룰 시절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본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비관하여 스위스로 떠나와 반(半) 망명의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예리한 지성을 번득이며 하늘과 땅과 (그 중간 지대인) 산을 관찰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인간사 복잡다단함을 관조하고 있었던 거죠.

스위스 하면 아무래도 한국과는 달리 눈 덮인 산악의 풍광이 인상적인데(물론 한국도 겨울철 중부 지방에는 눈이 자주 옵니다만), 저자 역시 이 점이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시인들이 흰 코트라고 부르듯 눈더미는 찢긴 옷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p94)."

사실 한국에서도 도시 인근의 야트막한 언덕 지형(한국인들은 이런 곳도 산이라고 부르죠)엔, 눈더미가 보기 싫게 여기저기 습하고 그늘 진 곳에 남은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름철 녹지 않은 눈이 남은 것을 거의 볼 수 없는데(예외라면 전북의 무진장 지역 정도? 그러나 이곳 리조트에서도 인위적 관리를 해야 합니다) 스위스에서는 그렇지 않아 다음과 같은 기술이 책에 있습니다.

"여름날 고산지대에서 잠시 내리는 눈으로도 산은 베일에 덮인다. 그래서 멀리에서 볼 때는 완전히 백설에 뒤덮인 모습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마치 자연이 요술을 부린 듯 작은 산의 부분들이 살짝살짝 보인다."(p95)

"변화무쌍한 풍경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다."(같은 페이지)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저자는 획일성, 일률성, 단조로움, 기계성 등을 혐오하고, 그 대신 자유롭고 변화무쌍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융통성 등을 좋아합니다. 또 저자는 이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이라 보며, 압제와 단속, 권력, 상식과 계약에 기초하지 않은 사회성과 질서 등을 궁극적으로 타파해야 할 악, 족쇄로 보는 듯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이분보다 약 십 몇 년 앞서 출생했고 저술가로서의 시기도 많이 겹치는데, 두 분의 저작을 비교해 보고 어디가 닮았으며 어디서 분기(分岐)하는지 살피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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