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대화 - 너는 왜 그렇게 말하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이진희 지음 / 청림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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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통하는 관계가 가장 답답합니다. 사람은 유일하게 정교한 음성 수단, 문자 매체로 통해 정보, 의사, 감정을 교류하는 동물입니다. 그런 인간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짐승 수준으로 관계가 타락하는 건 순식간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말하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한의사이신 이진희 저자가 처방하는 "고장 난 대화"의 치료법을 읽고, 우선 앞서 든 생각은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말하고..."를 뒤집어 생각하면, "나는 왜 '그/그녀'에게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했을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무심히 던진 말이 결국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거고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사과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p70)" 예전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어느 에피소드에도 보면 남편이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용서해 줘."라고 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이에 아내는 "봐, 당신은 당신 잘못이 뭔지 모르잖아? 그러니 우리는 서로 안 맞는 거야. 이혼해."라고 대꾸합니다. 저자께서는 애매한 경우라도 일단 자신이 먼저 사과하는 버릇을 들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무조건, 기계적 사과가 만능책이 아님을 곧 깨닫습니다. "영혼 없는 사과에 본인이 먼저 지치고(p71)", 그 이전에 대화의 정석은 "자신의 느낀 감정을 솔직히 털어 놓는 게(같은 페이지)" 우선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대충 "에이 그냥 이거 먹고 떨어지라고 하지" 같은 소통은 오히려 상대에 대한 모욕입니다(그가 설령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저질이라고 해도). 미안하다는 기계적 반응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인데,. 라며 경위를 말하고 상대의 진심 어린 이해를 구하는 게 더 인간적이고 정중한 선택입니다. 한의사 역시 사람 상대를 많이 하는 직종이긴 하나 한의사쯤이나 되어도 이렇게 상대방을 섬세한 방식으로 배려해야 하니 한국이 참 관계 피로도가 과한 나라인 건 틀림 없습니다.

어느 재벌 총수 가문 때문에 "분노 조절 장애"라는 병명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p50 이하에는 이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데, 사실 저는 우리 한국인들 대부분이 작게든 크게든 이런 "병"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장 저부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자신이 타인의 반응에 대해 불건전하고 비이성적 분노를 (대놓고든 아니든 간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정말 답이 없죠. 저자는 첫째 "이 일은 당신과 당신의 가정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걸 강조합니다. 한의사이시니 만큼 다양한 환자들을 겪으실 터이며,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자신의 증상이 특이하다고 여기겠으나 그들을 그룹으로 다루다시피 하는 입장에선 전형성이 캐치되는 거죠. 이런 이들에게 "당신만 이런 일로 힘들어하는 게 아닙니다"라는 말 한 마디(사실은 팩트인데)를 건네 주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존심, 권위, 체면이 몹시 중요하다(p73). 그것들이 무너지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여긴다." 안타깝지만 이런 장애를 가진 이들 역시 우리 주위에 매우 많습니다. 일단 이런 분들은 실제보다 자신의 능력을 매우 부풀려 평가합니다. 똑똑하지도 못하고 직감도 예리하지 못하며 가문의 배경도 시원찮은데, 그 반대로, 자기 기대대로 남들이 받아들이며 존중하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가족과 친구를 힘들게 하며, 어디서 새로운 사람을 알아 그 사람이 자신의 말에 잘 맞춰 주면 즉시 기존의 지인에게 "이 사람이 날 대하듯 너도 나를 대해!"라며 새로운 미션을 부과합니다. 내가 잘 되는 게 곧 네가 잘 되는 거라며 남에게 말도 안 되는 희생을 부과합니다. 우습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코믹한 망상에 시달리며 그 포로가 된 인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세련된 표현이 전부가 아니죠. 저자께서는 "나이도 어린데 어찌나 세련되고 부드럽게 표현하는지 부럽기도 하다.(p83)"고 하시는데, 사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좀 의외였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제가 부러운 사람은 세련된 말보다는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 세련된 말재주를 가진 사람이 부럽다면, 혹 내가 하는 일이 일의 결과, 질에 비해 남들에게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던 적이 잦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여튼 저자는 "처음부터 잘 할 수 없고, 혹 소통이 서툴렀다고 해도 나 자신에게 토닥토닥해 줄 수 있으면 좋다"고 하십니다. 어쩐지 이 대목은, 나름 소통에서 상처를 입으신 적도 있던 저자가 아마도 자신에게,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지닌 독자들을 향해 특히 던지는 충고 같습니다. "자존감은 비판과 비난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통해 성장한다(p85)."는 말씀은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겠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같은 시 구절도 있지만,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바 상처 입은 바 싫어하는 바만 정확히 알아 자기 마음만 정확히 짚어도 평화와 안식이 절로 올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여기서 "꼰대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잠시 말씀합니다(p145). 요즘 유행하는 대로 꼰대들은 "나 때(소위 "라떼")는 말이야.."를 버릇처럼 되닙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대가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 "나 때" 타령을 하면, 상대의 감정을 별개로 하고 말하는 꼰대 자신은 과연 만족을 느낄까요? 만족은 결국 그 말을 듣는 상대가 자신의 의사, 감정을 알아 듣고 그대로 반응해 줘야 진짜 만족이 오기 마련인데, 꼰대는 일시적으로 자기 만족에 빠질 뿐 결국 상대가 그를 무시하므로 궁극의 만족은 못 얻습니다. 그래서 꼰대짓이란, 가면 갈수록 자신을 고립에 빠뜨려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불행하게 만듭니다. 꼰대들이 흔히 하는 말이 "너, 역지사지를 좀 해봐!'인데, 이건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그에 맞춰!"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혀 남과 소통하려 들지 않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죠.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 사람은 남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루저(p191)". 이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이 책을 쓴 저자가 대학생때 가진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대개 세계관이 염세적이라고도 하시네요. 도움은 남한테 구할 수도 있으며 그게 민폐가 아닌 이상 얼마든지 소통의 일환으로 추구할 수 있는 거죠. 자신이 자기 완결적이라고 착각하는 건 자신만 망가뜨리고 고립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변, 그리고 자신이 몸 담은 조직까지 다 망치는 길입니다. "영어 잘하려면 반복, 반복 잘 하면서, 관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말은 왜 반복하지 못하는가?"(p193) 두고두고 반복하며 새길 만합니다.

남에게 진짜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은, 이런저런 상처도 받고 경험도 많이 겪으면서 그를 통해 진짜 교훈을 추출하고, 이를 잘 정리해서 남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한의사로서 권위 있는 처방과 진단도 많았지만, "인간 이진희"가 자신의 인생에서 치러 낸 여러 시행 착오를 진솔하게 토로하는 대목도 많았습니다. 책의 주제가 진솔한 소통이며, 그런 주제를 표현하는 방법 역시도 역시 진솔한 소통이니 겉과 속이 일치하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많은 불편과 고통은 알고 보면 말과 행동이 달라서이며, 고장 난 그 숱한 대화 역시 서로에게 진실해지기만 해도 "낫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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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0-02-0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화를 통해 풀어라고 조언은 많이 하지만, 정작 서로 원활하게 대화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대화를 위해서 어떤 노력과 기술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는 참 힘든 작업이라고 봅니다.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