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제인 오스틴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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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에 박희정 작가님의 일러스트가 풍부히 곁들여진, 오스카 와일드의 고전 <도리런 그레이의 초상>을 읽었습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악당의 저주 받은 사연과, 대부님이 빚는 차갑고도 몽환적인 순정만화의 스타일, 필치가 매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습니다만, 이 콜라보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제인 오스틴의 명작과 다시 이뤄질 줄은 짐작 못 했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이 대표작 말고도, 그녀의 다른 작품들 역시 끊임 없이 재해석되거나, 은막에 의해 옮겨지기나, 아니면 바로 이와 같이 외국에서의 색다른 트리뷰트를 받는 중인데,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프랑스나 독일의 문학이 여전히 더 활성화되었고, 전문가들로부터의 평판도 높았던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동시대의 다른 걸작들보다 유독 영국의, 그 중에서도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이처럼 끊임 없이 재조명 받는 걸까요? 일단 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현대가 여성의 사회적 역할, 내면에 대해 철저한 재구성과 분석이 이뤄지는 시기이며,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제인 오스틴의 섬세한 감성과 통찰이 여전히, 아니 의외로 도구로서 혹은 지향 설정으로서 큰 도움을 발휘하는 저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유의 다른 하나로는,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링구아 프랑카"로서의 영어가, 이백 년 전과는 비교가 어려울 만큼 널리 확산되어, 전 지구적 범위에서 영어를 준 모어로 수용하는 인구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도 됩니다. 예전에 저는 한창 일본 드라마가 국내에 저변을 넓힐 때, "능력자(덕후?)들이 자막을 잘도 만들지만, 원어로 바로 소화하여 들을 때의 그 미묘한 맛은 도저히 못 살리지." 같은 반응을 접한 적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인 오스틴이 구사하는 19세기 영어는, 말을 원어민들이 구사하는 날것 그대로 받아들일 때, 여태 못 느껴보던 감흥과 각성의 "맛"이 어떠한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아주 모범적인 "문학의 힘"을 증명합니다. 중국이 아직은 절대 미국(영어를 쓰는)을 못 따라가는 게, 중드(심지어 대드라고 해도)를 볼 때 그 쓰인 대사이건 배우의 감성 표현이건 도저히 이쪽을 넘볼 수준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갑자기 누가(그것도 여성이) 실종되기나 하는 그런 풍조에서, 사람의 깊은 감성과 내면에 어필하는 무슨 걸작 따위가 과연 나올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저는 <오만과 편견>의 청춘의 필독서인 줄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떤 고전 명작이든 청춘기에 읽으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오만과 편견>은 어떤 출판사의 어떤 컬렉션에서도 고전 명작 리스트에 올려져 있습니다(과거나 지금이나). 아마도 마치, 과거 나이 든 세대가 읽던 일본산 순정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처럼, 이상적이고 몽환적인 세팅이 기본으로 깔린 채, 다만 감성과 소통과 반응만이 날카롭게도 현실을 직시하는 이런 전개, 이렇게 구축된 허구의 세계가, 자칫하면 끓어오르는 열정을 못 다스려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기 쉬운 청춘을 바람직하게 순치시킬 수도 있다. 뭐 그런 뜻으로 선해하고는 싶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리뷰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사실 이런 작품은 아예 박희정 작가님이, 마치 타계한 고우영 화백 같은 <삼국연의>를 재창조했듯, 전면 만화 포맷으로 창작될 필요가 있다고생각합니다. 요즘 세대가 오로지 게임 세계의 언어와 논리로 소통하거나 (드물게도 희한한) 영감을 받는 것처럼, 웹툰 역시 새로운 시대의 예술 장르로 자리를 잡은 게 엄연한 현실이고 그걸 부정하려 발버둥쳐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시도를 보며, 이제 텍스트 온리의 시대는 확실히 저물어가지 않는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텍스트 온리의 시대에 너무 많은 것을 여태 투자해 온 입장"에서도, 회수 못 할 매몰비용은 그냥 포기해야 하지 않냐는 씁쓸한 각성이 들어서 하는 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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