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재판 - 이론·제도·실천
권영법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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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받을 권리"란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보장되는 기본권입니다. 재판을 받긴 받되, 경찰력에 의해 구금된 채로 기약도 없이 무한정 지연된다면 설령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소중한 시간을 창살 뒤에서 허비한 후일 뿐입니다.(본래 결백했으나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 나중에서야 재심 청구 등으로 신원이 된 경우 등은 아예 논외로 하고라도) 그래서 우리 헌법(형사소송법 이전에)은 27조 4항에서 이미 이런 법적 근거를 마련합니다.

자신을 잡아 가둔 경찰관이나 검사, 혹은 삼권 분립이 이뤄지지 않은 체제의 행정 관리, 혹은 막연한 여론 따위가 아니라, 정식으로 훈련을 받고 적절한 소양, 자격을 갖춘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 역시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로 보장됩니다. 한편 그를 기소하는 소송당사자도, 역시 무슨 흥분한 다중이라든가 경찰관 등이 아니라, 이른바 "공익의 대변자"인 법률 전문가인 검사입니다. 물론 미국 같은 경우 기소에 앞서 대배심(시민으로 구성된)이 열립니다만 이 과정에서 검사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건 같습니다.

얼마 전 성범죄 사건에 한해서 "피고인이 자신이 무죄라는 입증 책임을 지게 하자"라는 어떤 경찰 출신 변호사의 주장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법치국가에서 어떤 피의자, 피고인의 혐의라도 그 범죄 사실은 검사(국가)가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위험의 소지가 있습니다. 민사소송에서 공해의 피해 같은 건 피해자가 아닌 회사, 공장 등에게 입증 책임을 지우는(전환하는) 경우가 예외적으로 있긴 합니다만 엄연히 형사 소송과 민사 소송 절차란 그 본질이 다릅니다. 성범죄라 해도 얼마든지 국가 권력 등에 악용되어 반대 세력을 매장시키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법원은 설사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사실을 인지했다 하더라도, 검사의 정당한 기소를 거친 사건에 한해서만 심리한 후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법원은 결코 주도적으로 피의자를 문초할 수 없으며, 죄상을 밝혀내는 일은 어디까지나 검사에게 맡겨야 합니다. 법관이 검사의 역할을 겸하는 재판은 원칙적으로 무효이며, 마치 전근대 마녀사냥이나 종교 재판 따위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법관이 검사를 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검사가 법관을 겸해서 안 된다는 말과도 서로 통합니다.

법원이 검사의 위치에서 피의자를 문초하는 방식을 "규문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시스템이라면 피의자에게는 "방어권" 따위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저 법관의 자비나 현명함에만 기대어, 억울한 피의자가 그 누명을 벗을 뿐입니다. 보물선의 허황된 꿈에 눈이 멀어 범죄자들의 수족 노릇을 한 잡법은 이런 체제 하에서라면 이미 치도곤을 맞고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형사소송법은 "증거재판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 요즘 영장실질 심사나 본안재판에서 "합리적 의심" 운운하는 건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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