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경제학 - 4만 년 인류 진화의 비밀
필립 E. 워스월드 지음, 이영래 옮김 / 동아엠앤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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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패러다임은 끊임없이 진화해왔습니다. 아니, 적어도 현상을 오래 유지하지 않고, 이 페이즈(phase)에서 저 페이즈로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오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예전에 "경제이론은 계속 돌고도는 것"이란 말까지 했습니다.

이 책은 실무와 이론 경력을 두루 갖춘, 필립 E 에스월드의, 다분히 새로운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이른바 "코드 경제학"이란 것인데, "경제학"이라는 표제어 중 일부 때문에 혹시 어려운 내용 아닐지 지레 겁먹는 독자가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경제학 관련 토픽은 이 책에서 아주 비중있게 실제로 다뤄지며, 심지어는 경제학사 입문자에게 이 책을 개념서로 권해 줘도 될 만큼 (저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다른 용도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허나 내용은 인류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꼭 "경제, 경제학"에 독자의 시야를 한정하여 읽어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문명사 전반"으로 영점을 조준한 후에야 저자의 취지를 곡해하지 않고 온전히 독해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저자가 논하는 "코드"는, 인류의 습성이랄까 통성 한 부분에 주목한 개념입니다. 즉 인간은 문화와 문명의 고안, 개척 이전이건 이후이건, 사물과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코드를 만들어거 해석하며, 또 자신의 대응(혹은 응전, 토인비식의 개념) 과정에서도 코드 만들기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이런 코드 만들기, 혹은 코드라는 렌즈를 통해 걸러대는 습성이, 특히 경제학이라는 거대한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4차 산업혁명의 여파 때문에 누가 일자리를 잃는다느니 뭐니 하며 논의가 분분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21세기에 고유한 현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 90여년 전 폴 더글라스라는 경제학자가 감지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던 그 아티클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먼 과거(적게 잡아도 중세)에는 수 년 혹은 십 수 년 동안 잘 훈련된, 계산에 능하고 장부 작성 기법에 정통한 전문가들만이 사업체에 속하여 우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만, 더글라스의 시대에는 이미 "미숙련 여성 노동자들"이 불과 수 주의 훈련 기간만을 거쳐 이 분야에 투입되곤 했던 현상이 (특히 이런, 눈 밝은 학자 같은 이들에 의해) 지적되었던 것입니다. 이 아티클이 발표되고 얼마 후에는 "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불린(오타 아닙니다) 여성들이 계산 등 특정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게 그리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닌 게, 1980년대만 해도 학군 내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주산 잘 놓는 학생들이 차출되어 인문계 고교 등의 내신 성적 산출에 동원되기도 했었으니, 이들이 다 "컴퓨터"들이 아니고 뭐였겠습니까. (품삯이나 제대로 쳐 주기나 했을지 원)

이 책에서 인용되는 더글라스 교수는, 특히 경제학 전공자라면 초년생 시절부터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는 게, 이른바 규모의 경제에서 체증이나 체감 말고 스케일 비례하여 수확이 균일하게 발생하는 이른바 콥-더글라스 생산함수를 공동 창안한 바로 그 사람이라서입니다. 고교에서 이과 출신들은, 지수함수의 경우 아무리 미분을 해도 "거의 그 원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현상을 잘 알 텐데, 바로 이 성질을 콥과 더글라스가 자신의 모형 구상에 그대로 써먹었습니다.

인간을 두고 흔히 "도구를 만드는 동물(homo faber)"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원시적일지라도 어떤 도구를 만들어 쓰기 전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자신의 능력을 훨씬 증가시킬 수 있는 어떤 도구를 만들어 온 그 오랜 패턴과 습성에,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4차 산업혁명(저자는 꼭 이 개념을 책 속에서 쓰지는 않고 있습니다)의 트렌드를 포섭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기한 건, 우리들 현대인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능력, 퍼스널하게 몸에 지닌 능력"만을 신봉할 뿐, 기계를 통한 능력 증폭, 대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는 거죠. 저자는 이런 완고한, 혹은 이해가 뒤떨어지는 이들을 위해 "더 예가 필요한가?"라며 다양한 예증을 들고 있습니다. 이래서 제가 이 책을 "경제사, 경제학사, 혹은 문화사 입문서"로 써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안 하고와는 별개로 말이죠.

책에서는 "코드 사용의 극한 도전" 끝에 발명해 낸 핵무기, 그에 연관한 프로젝트(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를 거론하며, 다시 윌리엄 제본스를 거론합니다. 윌리엄 제본스 역시 칼 멩거, 레옹 왈라스(레옹 발라) 등과 함께 지지난 세기 이른바 신고전 학파의 3대 개조 중 한 사람인데, 이 책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제본스를 자주 거론합니다. 이 이론은 참으로 다양히, 저자에 의해 이곳저곳에 적용되는데, 심지어 블록체인의 핵심 이론 파트인 "인증-검증 알고리즘"에까지 이 제본스의 이론을 적용합니다. 이미 네그로폰테 같은 인문학자에 의해 문명, 나아가 인간 본성까지 디지털 부호로 변형, 재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 책에서 우리는 "너무도 코드를 좋아하다 코드 자체로 변화해 버릴지도 모르는, 마치 콧대 높은 사람이 되려다 아예 코 자체로 바뀌어 버린 코발료프 서기관"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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