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처럼 술술 읽히는 철학 입문
가게야마 가츠히데 지음, 김선숙 옮김 / 성안당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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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 에우클레이데스가 이집트에 터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어느 귀한 신분에게 던진 일침이라고 합니다. 허나 우리 모두는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사유의 위대한 길을 모두 빚진 셈입니다. 오로지 배운 것 없는 천한 닭머리만이 무엇을 선현에게 얼마나 의존했는지 도통 감을 못 잡고 제멋대로의 망령 든 소리를 떠들기 마련이죠.

이 책은 "왕도 중의 왕도, 철학자 28인을 이 한 권에 담았음"을 선언합니다. 전혀 과언이 아닌 것이, 철학자들의 선견지명과 패러다임 건설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두뇌의 소유자일 뿐인 우리들은 아예 짐승의 단계를 여태 탈피하지 못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술적 지식의 광범한 축적만으로 운용될 수 없습니다. 지식의 디테일을 관통하는 원리, 이치의 발견이 있어야만 응용과 발전이 가능하고, 나아가 유한한 인생의 덧없음이 부르는 끝없는 권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야말로 축사 속에 사육되는 졸혼 돼지(그나마 공과금도 납부 못하며 회피의 핑계만 찾아대는, 경제적으로 궁핍하기까지 한)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은 대개 중등 교육 과정(중학교+고등학교)에서 서양 철학의 진수와 요약을 공부합니다. 헌데 교과서라는 게 흔히 그렇듯 서술이 딱딱하기 짝이 없고, 자세하지도 않게 간략한 요점만 던져 주듯 선언하고 끝을 내기 일쑤입니다. 이래서야 어디 그 위대한 철학자들이 얼마나, 또 어떻게 위대했는지 올바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심오한 학적 맥락을 이해도 못 하면서, 어렵고 모를 법한 지식 체계에 대한 밑바닥스러운 적개심이 마치 교양의 증명인 양 큰 착각을 하고 추태를 떨지 않으려면, 우리는 예컨대 어느 달인의 요령 넘치는 가이드를 통해서라도 그 철학 체계의 진수에 대해 좀 배워야 합니다. 그런 시도도 사실 지금껏 없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까다로운 철학 이론 체계를 단 한 권만의 숙독으로 일별하기란 역시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일단 초심자들에게 쉽게 다가옵니다. 마치 일상에서 친숙한 대화나 나누듯 캐주얼하게 펼쳐지는 말투 속에, 아 그들(위대한 철학자들)이 바로 이 말을 하고자 함이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물론 초심자 레벨에서는 뭘 읽어도 새롭고, 하나하나가 맹인의 개안을 시켜 주는 듯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 마디를 배우고서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적 자양분 노릇을 해 줄 알짜 명제의 집합 텍스트를 만나기는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년 시절에 정말 잘 읽은 책 한 권은 일생을 두고 지혜의 자침 기능을 해 주니 그런 책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리와 사상 파트를 특히 어려워하는 중고생들에게, 이 책을 교과서 대신으로 추천해 주면 아마 고난도의 수능 (해당과목) 문항을 푸는 데에도 아주 요긴히 쓸 수 있을 듯합니다.

"신의 힘으로 철학 따위는 엎어 버릴 수 있다고요." 오로지 책 속에만 갇혀서(물론 자발적인 감금입니다만) 신의 명령과 섭리를 탐구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다운 언명입니다. 물론 신은 개념상 전지전능하므로 철학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 전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문(철학 포함)은 신학의 시녀로 불리기도 했던 것(이 책 p132)입니다. 한편으로, 단단히 구축된 (이상적) 철학은 이미 신학과 동급이므로 사실 완전한 섭리를 주재하는 신이라면 (그런) 철학을 엎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이 언명이 은근 함의하는 결론으로는, 철학이 신학(그리고 종교)에 대해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 쟁쟁한 계몽철학자들이 근대에 어떤 맹렬한 활약을, "철학의 이름으로" 수행했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이들은 과학자이기 이전에 철학자였기에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를 전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천한 닭대가리라야 "철학은 뭔지 모르겠고 과학이 최고다"라는, 완전한 자가당착의 헛소리를 떠들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무지와 몽매의 신을 엎어버린(p171) 건" 바로 철학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위대한 이유는, 벌써 저 제목에서부터 표방하고 있듯 "과연 보편과 이상은 실존하는가, 아니면 그저 이름만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 뿐인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작품 속에 잘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찔한 게, 어쩌면 당대 직계의 사제 관계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서 이처럼이나 첨예하고도 심오한 "입장의 대립"이 태동할 수 있었냐 하는 점입니다. 이후 천 년이 지나도록, 유럽의 철학자들은 두 거인의 대립 지점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셈 아니었습니까.

이 책에도 나오는 이븐 루시드 등 아랍권 학자들의 공적(그리스 황금 고전기의 업적을 잘 보전, 발전시켜 후대에 이어 줌)도, 사실 근본의 문제를 터치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집대성한 자연과학 중 기술적 부분에만 집중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문명 자체가 진화를 이루려면 철학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중국 문명이 그토록 빼어난 기술적 업적(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을 이뤘어도, 결국 한대, 당대, 송대, 명대를 거치면서 내내 사회 구조가 제자리걸음에 그쳤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한 시절을 풍미했었던 중빠 조셉 니담의 이론은 벌써 극복되어 가는 중).

17세기의 영국은 물론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이긴 했지만, 국교회는 가톨릭을 제외한 어느 교파에 대해서도 대개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가톨릭도, 또 그와 첨예하게 맞선 청교도(퓨리턴)들도 타 종파를 용납하지 않는 스탠스였기에, 오직 이들만이 영국의 체제 안에서 배척되기에 이릅니다. 책에서는 이런 영국, 즉 체제 자체를 위협하지만 않으면 전적으로 중립, 관용의 자세로 대하는 열린 사회 분위기에 대해 다른 유럽 사회에서 매우 큰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았다고 전합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아는 용기와 사용하는 용기"라고 표현하는데, 이야말로 중세의 암흑과 질곡에서 유독 그들(서유럽인들)만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지금 이슬람을 한번 보십시오. 또 배타적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누에고치 속에 다시 파고들어가려는 중국인들을 보십시오. 가장 자폐적이고 극성스러운 밑바닥이 "과학"운운하는 것처럼 참담한 코미디가 다시 없습니다.

칸트의 체계란, 사실 철학을 수십 년 전업으로 연구한 학자에게도 어렵습니다. 하긴 어디 어려운 게 그뿐이겠습니까. 그 앞 시기에 활동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철학자들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칸트는 당시(자신의 동시대)에 이뤄어진 모든  자연과학 체계를 자신의 철학 안에 통합하려 들었고, 실제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 p185 이하에 나오는 대로, 그는 대륙의 합리론과 브리튼의 경험론을 놓고 위대한 "종합"을 이루는 데 깔끔하게 안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감성→오성(인과관계의 분석)→"이들을 정리하는 편집실 같은 장소로서의" 이론이성 등 3단계로 정리합니다. 물론 이 모두는 칸트의 오리지널 업적이지만, 저 "편집실 같은 장소" 같은 표현은 이 저자의 독창적인 설명이고 정리, 해석입니다.

히틀러에게도 (비뚤어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되는 니체의 철학은, 사실 진정한 천재적 사유의 산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독창적입니다. 칸트나 헤겔처럼 종전의 모든 사유와 업적을 단일 체계로 종합한 업적도 대단하지만, 그야말로 파천황, 평지돌출의 희한한 사유를 독자 철학으로까지 완성한 니체 같은 류의 사고방식은 과연 독일 지성만이 보유한 긍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약자를 미화하는 철학, 종교"는 전세계에서 박해를 받으며 떠돌던 유대교의 개성이었고, 이것이 그리스도교로 그대로 전수되어 "노예 철학"의 완성으로 귀결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형식화한 로마 가톨릭을 온몸으로 배척한 것도 독일의 루터였는데, 이 니체(역시 독일인인)의 단계에 이르면 아예 기독교 자체를 배격하기에 이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본래 게르만의 체질에는 애초부터 기독교나 헤브라이즘 요소가 맞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그의 언명 배경에는 이처럼 기독교 자체의 모순이 한계 상황에 이를 만큼 표면한 시대 상황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볼만한 대목은 20세기 이후 들불처럼 대두한 실존 철학을 설명한 후반부입니다. 저자 자신이 이 실존 철학의 핵심 논지에 전적으로 공명하는 분이기에, 마치 만화의 대사처럼 거리낌없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오히려 핵심을 찌르는 일갈로 해당 조류(철학자별)을, 누구에게나 와 닿는 감성적 표지로 잘 전달합니다. 서양 철학은 비단 철학이라는 단일 분야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지향, 지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각종 담론, 예컨대 슬라보예 지젝이라든가 박노자의 주장이 과연 뭘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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