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라이프 -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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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를 쓰고 돈을 벌며 경쟁에서 승리하려 애 쓰는 건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손에 쥔 효용보다 써 버린 자원, 희생한 기회비용이 더 크다면, 그런 삶은 결코, 누구의 관점에서도 잘 산 삶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린 인생, 주객이 전도된 분투의 과정은, 당사자의 노력에 불구하고 결국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남들 시선을 따라 일단 내 자신이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종착점이 무엇인지 먼저 그 기준을 바르게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행복, 행복"이라 말은 쉽게들 하지만, 대체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자고 합니다. 사전을 아무리 찾아 봐도 행복의 정의에 대해 거창한 설명은 많지만, 이 심오한 설명을 깊이 궁구한다고 해서 어떤 깨달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깨달음이 혹 온다 한들, 문자 그대로 내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전의 해명 중에는,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란 말도 있다고 합니다. 책에도 나오지만(p31), 영어의 happy 역시 haphazard("닥치는 대로의")라는 단어에도 그 형태소 일부가 들어 있듯, 인생의 목표가 그저 우연에 기대는 것이라면,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는 허망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말로 이렇게 믿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까지 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인생은 무가치한 오탈자, 솜사탕 먹다가 이빨은 물론 잇몸을 통째 잃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잉여 단위일 것입니다.

저자는 조건이나 정의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체험"에 행복의 본질이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하긴 아무리 철학자의 신묘한 통찰로 행복의 정의를 구성했다 쳐도, 그 철학자 본인이 감정으로 육신으로 마음가짐으로 행복해 본 적이 없다면 이는 일개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그런 말의 성찬은 다른 누구에게도 작은 효용조차 가져다 주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이란 단어에 그저 행복의 "조건"만이 표현되었다면, "쾌족(快足)"이란 단어를 통해 행복의 "체험"을 담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행복의 측정 기준도 제시하는데, 이 중에 PANAS(positive and negative effects after schedule)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positive의 항목들에는 "관심있는, 신나는, 강렬한, 자랑스러운, 정신이 맑게 깨어 있는" 등이 포함되는데, 저자는 이 중 놀랍게도 "행복한"이 정작 빠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행복하기 위해 정말로 "행복함"이란 단일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다른 부수적인 긍정 정서를 두루 경험하면 족하다는 뜻(p37)도 됩니다.

저자는 이런 지적도 합니다. 흔히 지식인들은, "행복"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니체는 "행복? 그런 것은 영국 치들이나 추구하는 거야!"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범인들이 꿈도 못 꾸는 경지를 내다볼 능력이 있어도 그 자신은 지독히도 불행한 삶을 사는 게 보통인데, 어쩌면 이런 예외적인 경우는 그 불행 속에서 오히려 쾌감을 찾아내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며, 대다수의 사이비들은 말(물론 거짓말)로만 달관을 가장할 뿐 속으로는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기만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낼 뿐입니다. 이런 사이비들은 머리 속에 최소한으로 채워 넣은 지식도 없으면서 주워 들은 말로 거짓된 에고를 꾸미는 게 고작입니다.

책은 이어서, PANAS에서 제시하는 긍정, 부정 항목의 하나하나를 잘게 해설합니다. 순서가 중요하지는 않으나 여튼 긍정 섹터의 처음에 오는 것은 "관심있는(interested)"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몰입할 때,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여튼 감정과 지적 능력이 가장 활기를 띠는 건 사실이죠. 저자는 여기서, 니체 같은 사람이 행복의 "피상적이고 얕음"을 비웃었으나 설령 그런 이도 이 "관심있는" 상태를 두고 그런 비난을 할 수는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실제 니체 역시, 그의 영감어린 저작을 구상하고 신들린 듯 글을 써내려갈 때 가장 "관심있는(무엇을 향해서건 간에)" 상태였으며, 또한 가장 "행복"하지 않았겠습니까? 독자인 제 생각이지만 PANAS의 구성자들은 아마도 니체 같은 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일종의 방어논리까지 다 고려하여 이런 체계를 만들어낸 듯합니다.

PANAS에는 부정적인 감정 역시 포함되는 점 앞에서 본 바 있습니다. 저자는, 사람이 행복을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체험의 pool 안에 부정적 감정이 일정 부분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게 PANAS의 암묵적 전제로 깔렸다고 말합니다. 하긴, 내내 몽롱하게 행복하기만 한 체험의 연속이라면, 종국에 가서는 그게 행복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지루함으로 변환되어, 일종의 고통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습니다. 단맛은 쓴맛과 대비될 때 자신의 정체성을 더 분명히합니다. 바버라 프레드릭슨(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교수이며 올해 54세입니다) 등은 2013년의 한 실증 연구에서, 행복과 불행이 대략 3:1 정도의 비율로 섞이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는군요. 이런 연구를 두고 아주 피상적 태도로 비난하는 자도 있으나, 실증 연구에 제대로 몸 담아 본 적도 없는 철저한 무식자나 쉽게 내뱉는 비난이며, 예컨대 "튜링 테스트" 같은 건 인공지능 이론 중에서 가장 주관적이며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자의적 설정이라는 점을 전혀 이해 못하고 함부로 날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에 캐나다로 이민 간 분들이 꽤 많습니다만, 설령 "행복의 나라"에 간다고 해도(한대수 씨의 노래가 생각나는군요), 그 구체적인 개개인이 꼭 행복해진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어느 연구 결과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는 답을 내어놓습니다. 출신국(꼭 한국이라는 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등 여러 나라)에서는 현저한 불행을 체험했던 이들이, 새로 정착한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평균적 시민이 누릴 만한 수준의 만족을 체험했다는 거죠. 저자는 이를 두고 "사회의 질이 유전의 힘을 이길 수 있다(p75)"는 멋진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물론 사회의 질이 뛰어나도 유전자의 질이 워낙 나쁜 닭대가리의 경우 끝없는 허언과 망상을 통해서나 그 못된 천성의 해악을 감당해낼 수 있죠.

과연, 유전의 힘은 생각 외로 강하기도 합니다. 책 p81에는 필립 브릭먼의 등의 1971년 연구를 인용하며, 이른바 "hedonic treadmill(번역은 '쾌락의 쳇바퀴')"라는 개념이 소개됩니다. 일시적으로 어떤 자극을 받아 감정이 고양되었다고 해도, 마치 인체가 항상성을 유지하듯,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균형점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런 균형점은 누구라도 자신의 고유값을 가지며, 가령 예를 들면 복권 당첨이란 극단적 체험을 해도("행복이 요행"이라는 고전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봐야겠죠), 사람이 칠칠치 못하면 제 타고난 복이 고작 그것이라고 거금을 탕진한 채 도로 출발점으로 돌아오곤 하는 게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혹은, 어설픈 독후감이 신문 독자 투고란 같은 후미진 구석에 게재되거나 판촉 공모 행사에 당첨되어 푼돈의 상금을 받은 후 흡사 작가 반열에나 오른 양 큰 착각과 나댐에 빠졌으나, 결국 제 초라한 실업자의 분수가 전에 비해 다를 바 하나 없어진 걸 깨닫는 초라하고 씁쓸한 자각과도 같죠

행복은 과연 환경의 힘, 유전의 힘 중 어디에 더 크게 좌우되는가? 행동유전학자들은 후자의 연구에 보다 치중하고, 환경론자들은 전자를 변수화하여 구체적 상관관계를 계산해 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다만 인생의 특정 국면을 보다 정밀하게 들여다 볼 어떤 계기를 마련해 줄 뿐입니다. 이후 책은, 환경론자의 방법, 그리고 심리학자의 방법을 번갈아 가며 소개합니다. 전자는 행복을 위해 먼저 환경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이며, 후자는 "그저 마음 먹기에 달린 거야!" 같은 내용입니다. 저자는 분명 심리학자이지만, 개인에게 역으로 과부하를 안기는 후자의 방법에 대해 일정 정도 한계선을 긋고 논의를 전개합니다. 즉, 개인의 행복에는 "환경의 변수"가 큰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소박한 상식에도 크게 부합하는 결론입니다. 성인, 초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인격 수양이나 의지만으로 평정의 경지에 도달하겠습니까. 절대 불가능이죠.

1.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이 역시 우리가 흔히 듣는 지침과는 반대방향을 걷는 명제입니다. 오히려, 좋아하고 않고는 주관적 착각일 수 있으니 객관이 검증해 놓은 "잘하는 일"에 매달려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많이들 권하죠. 둘이 일치하는 사람은 가장 운 좋은 편이겠으나, 많은 경우 이는 불일치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젊은이들의 클리셰라면서) "네 마음의 소리를 들어!"란 주문에 정말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하긴 한 번뿐인 인생, 어떤 여한이 남아서도 내내 불행하지 않겠습니까.

2. 되어야 하는 나보다 되고 싶은 나를 본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당위를 위해 실존을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는 양,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양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self-denial)이란 결국 고통과 인욕의 과정이며, 대체 그렇게나 큰 대가를 치르고서 얻는 완성, 성취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한 번쯤은 의심을 품어 봐도 됩니다. 책에는 첼리스트 요요마의 일화가 나오는데, 자신이 오래 준비해 온 연주가 "매우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게 19때의 일이라고 회고합니다. should를 want to로 바꾼 것이, 연주자로서의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 그리고 이 전환점이 59세가 아닌 19세에 마련되었던 게 얼마나 큰 행운이냐는 그의 말도 있습니다. 근데 독자로서 저는, 이처럼 성취의 과정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게, 행복한 연주자로서 그의 능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예에서 배워야 할 건 "말 자체"가 아니라, 그가 뿌듯이 느끼는 행복감 그 자체에 전염되는 체험이기 때문이죠.

요즘 소확행이란 말을 흔히 듣고 씁니다. 영어의 savoring은,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행복한 삶의 기술이라고 합니다.(p132). "젊어서는 쾌락이요, 나이 들어서는 의미"라는 말도 참 멋집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젊어서도 의미를 함께 탐구하고, 늙어서도 적절한 관리와 절제를 통해 쾌감을 함께 누리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망령이 난 닭대가리처럼 나잇값 진상을 떠는 건 곤란하겠지만 말입니다. 특히 저자는, 한국인들처럼 "어떤 의미"를 중시하는 민족에게 이 과정은 특히 깊이 탐구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p182에는 안니발레 카라치(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입니다)의 <헤라클레스의 선택>이라는 명화가 나오는데, 헤라클레스는 이 그림 속에서 두 여인을 두고 고민합니다. 한 여인은 고통스럽지만 의미로 가득한 탁월한 자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며, 다른 여인은 한 번뿐인 인생 즐겁고 신나야 하지 않겠냐고 합니다. 근데 저자는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듯, 왜 이 둘 중 반드시 택일을 해야 하느냐며 반문합니다.  앞 문단에서 제가 미리 예측한 결론대로, "삶은 택일의 문제가 결코 아님"을 깨닫는 게 참된 행복의 시작이라는, 책의 훌륭한 통찰이 비로소 전개되는 겁니다.

저자는 삶의 4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일, 사랑, 영혼, 초월

이 명제는 ROBERT A. EMMONS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가 정립하였으며(이 책 p282의 후주에 나옵니다), 그 외에도 자계서 저자로 유명한 폴 피어슬 박사의 저서에도 등장합니다. 일 없이 성취 없이 망상으로만 오탈허송세월하는 자는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그저 불행의 원천일 뿐입니다. 가족에게 배척당하고 불륜상대나 찾아다니는 노파에게 행복이 있을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 한들 제 영혼을 잃고 수전노 신세로 떨어진다면 그 사람은 자신 아닌 남의 행복을 간수하는 불쌍한 노예입니다. 초월에 대해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미천한 짐승입니다.

행복은 물론 자기 자신의 행복이 메인입니다만, 자기 중심성을 극복 못하는 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게 심오한 역설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마치며, 책의 명제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반드시 자신만의 자작곡을 지어 볼 것을 권유합니다. 하긴 행복해지겠다면서 남의 행복론만을 암송하는 모습도 엄청난 모순이죠. "굿 라이프"란 결국 어깨에 힘 빼고, 집착을 버리고, 내면의 정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웃과 소통하는 가운데 발견하고 이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저자의 <프레임>도 함께 읽어 보시면(이미 베스트셀러지만)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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