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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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느낌입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아니고는 개인 차로 돌릴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을 즐겨찾는 이들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역시 읽을 때마다 그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갈 겁니다. 이는 이른바 "나쁜 남자의 매력"과는 또 다른 류라 생각하는데, 어딘가 불쌍하다는 동정 비슷한 게 바로 그 이상한 끌림의 주된 원인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도리언은 사교계 데뷔 당시 그리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생김새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는 해도 그 이유를 스스로도 잘 모르는, 타인을 위한 관상용으로 고안된 전시품 같은 소외감에서 벗어날 줄 몰랐던 위태한 멘탈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머리가 비었고, 출신이 한미(p74 이하에 나오듯 귀천상혼 출신)했기 때문에, "인기, 선망"과 "자존(매우 유리한 조건이었건만)"을 일치시킬 수 없었지요.

"그만! 그만하세요. 너무나 당혹스럽군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뭔가 대꾸할 말을 찾고 싶은데.... (중략) 아니,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p44)

사실 여기서뿐 아니라 도리언은 아무 생각이 없을 때가 가장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 소년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도리언은 이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안간 삶이,(쉼표는 제가 넣었습니다) 타는 듯 강렬하게 보였다. 자신이 불길 속을 걸어온 것처럼 보였다. 왜 진작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p46)

마치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뱀의 꾐에 넘어가 결국 부끄러움을 알게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도리언은 아마 미모를 급속히 잃게 되었을 텐데(음?? 누구 맘대로)....

"그레이군, 자네의 외모는 놀랍도록 아름답네. 찡그리지 말게. 사실이 그러니까(아름다움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에 도리언이 반응한 듯). 그리고 미모는 천재성의 한 형태일세(헉!).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위대한 요소 중 하나야. ..... (중략)... 시간은 자네를 시기한 나머지 백합 같고 장미 같은 미소에 전쟁을 선포할 걸세... (하략)"

화가 홀워드는 이런 열렬한 확신의 표백을 그저 말에 그치지 않고, 신이 자기에게 따로 부여한 천재성을 발휘하여 화폭에 실천으로 옮깁니다. 말은 그러나 예컨대 도리언의 (아래) 표현처럼, 생각보다 위력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 음악이 우리 내면에서 창조한 것은 오히려 혼란이었다. 하지만 말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나 명백하고 잔인하며 생생한 것인지! 세상의 그 누가 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얼마나 미묘한(앞에서 명백하다고 한 것과 대조하여) 마법이 들어 있는가!"

여튼 화가 바질 홀워드의 손에 내려진 (신의)축복과, 유일한 자존의 근거가 사람들이 선망하는 화사한(resplendent) 미모에 있게 됨을 비로소 깨달은 도리언의 간절한 희구(p58에 나옵니다)의 위력을 함께 받아서이기라도 한지, 홀워드 필생의 역작인 초상화는 그 주인공 도리언을 대신하여 나이를 먹습니다.

여기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전 이 작품을 아동용 버전으로 초3때 처음 읽었는데, 그 서문에 보니 "... 어린이 여러분이 이해 못 할 만한 대목이 많이 나오므로 본서(어려운 표현인데)에서는 몇 군데를 고쳐서 소개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초상화가 나이를 먹고 사람은 그대로란 설정이 왠지 아이들 동화에나 나오는 설정같이 느껴졌으므로 아마 "고친 곳"이라면 여기이겠으며, 원작에는 "아이들이 이해 못 할" 훨씬 복잡하게 꼬인 "변신 스토리"가 나오거나, 아예 초현실적 요소가 제거된 진행이겠거니 짐작했더랬습니다.

근데 일 년 후 삼성세계문학 중 이 중편이 끼어든 권이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열심이 읽었더랬는데(故 이가형 譯 - 해문 추리소설 번역 참여로 유명한 그분이죠), 뭐 거의 그대로라는 걸 알고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지금 관점과 판단으로도 장담할 수 있는데, 제가 당시 읽었던 그 아동판은 성인 버전(이란 게 따로 없지만)이나 완역본과 별 차이가 없었고, 아마도 당시 역자들은 원작에 스며든 동성애 팩터를 우려하여 몇 대목(낯간지러워지는 대사 중 몇 구절)을 쳐낸 걸 두고 그리 말했던 듯합니다. 아니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화학자 앨런 캠벨과 그가 사실은 그렇고그런 관계였다든지...

헌데 오스카 와일드의 실제 생이 어떠했건 간에, 이 작품에는 외견상 이른바 퀴어 요소가 (그 숨은 주제를 제외하곤) 거의 없으며, 도리언 그레이는 작중에서 잘 드러나듯 의심의 여지 없는 이성애자입니다(오히려 정도가 지나침ㅋ). 혹 서두에서 화가 홀워드와 헨리 경이 이 젊은이를 농락하고 버린 일에 한이 맺혀, 여성을 상대로 한 엽색 행각에 빠져들었다는 대목이라도 들어갔다면 모르겠습니다만(아주 제가 창작을 하는군요).

이 역본에도 잘 드러나듯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해 언급한 몇 대목은 있습니다. 이를테면 p69에 올버니의 파머 경을 두고 그 성향을 설명하면서 "... 정치적으로는 토리 당을 지지했는데 정작 토리 당이 집권할 무렵에는 '급진주의자들의 무리'라며 호되게 비판을 가했다" 같은 말을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자유한국당 그것들 영 못 쓰겠더구만! 웬 종복 좌파들이 그렇게 많아?"라고 하는 식인데, 어느 정도 보수 성향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무렵 젊은이들[출신 계층 불문하고]에게 토리 당이 인기 없었던 건 잘 알려진 사실)"... 이처럼 그는 영국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그는 영국이 망해가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 거 참. 이 책은 예언서(?)를 겸한 것이, 실제로 영국은 이 파며 경이 우려(!)했던 대로 완전히 망할 뻔했다가 1980년대 들어서야 기사회생을 했다는...

헨리 경도 그 피가 어디 안 간다고 보수적인 건 매한가지라서, p87 같은 데를 보면 "날씨를 제외하면 전 영국에서 어떤 것도 개선되길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물론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요즘 영국 남자들은 기껏해야 돼지고기 가공업이나 벌이던 가문의 미국 여자들과 결혼하는 게 유행인데...." 같은 대목도 나오는데, 대표적인 게 윈스턴 처칠 경의 양친이었죠. 유행을 잘 따라서인지 그런 트렌드의 소생 중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니(이 양반도 초년에는 휘그당에 몸을 두었다가 나중에 보수당으로 옮겼지요) 유행이 마냥 해롭거나 가볍거나 속물적이라고 비난할 건 아닙니다. 흠.

도리언이 일생을 두고 타락하게 된 게, 불쌍한 여배우 시빌 베인을 버리고 자살하게 만든 후부터인데, 이 책에도 나오지만 그녀 역시 귀천 상혼 소생(부모 스탠스가 바뀌긴 했습니다만)이었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이 대목에서 도리언이 제 스스로를 부정하고 파멸시킨 터닝 포인트로 상징을 삼았을지 모릅니다. 아직 열여섯 살이었던 남동생 짐(제임스 베인)은 도리언의 마음 한구석에 남은 마지막 정의감의 잔해이고 말입니다.

"오, 내 철부지 동생아, 그분은 신사이고 왕자님이셔. 너도 보면 그분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완벽한 분이라는 걸..." 정작 너무도 철이 없었던 건 물론 그녀였지만 말입니다. 어째서 여자들이란 한번 눈에 콩깍지가 씌면 이처럼 분별을 잃게 되는 건지. 이런 천하에 쓰레기 같은 놈팽이를 두고 말입니다. 시빌 베인이 말한 "이상형의 왕자님"이란 구절은 물론 원 텍스트의 "프린스 차밍"입니다. 제가 어려서 읽은 아동판에는 오히려 처음에 역주 한 번만 넣어 주고 이 "프린스 차밍"이 번역도 없이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덕분에 영어 공부도 했다는...) 프랑스어처럼 수식어가 피수식어를 뒤에서 꾸미는 구조로도 볼 수 있고, "차밍"이 그 프린스의 이름이라고도 새길 수 있죠.

"하지만 당신은 언젠가 책 한 권으로 나를 타락시켰어요. 전 그 일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해리, 누구에게도 그 책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책 한 권이 문제가 아니라 이 헨리 경 같은 놈하고 엮이게 된 자신의 운수, 아니 자신 속에 싹트고 있던 못된 씨알머리를 먼저 탓해야 옳겠습니다만 우리는 도리언 같은 새xxx한테 애초에 뭘 기대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압니다. 요즘 같이 책이 대량으로 인쇄, 보급되는 시절이라면, 설령 진짜 마력을 지닌 책이 있다손 쳐도 아마 대중의 "입" 앞에서 그 에너지가 15도로 희석되지 않을까요? 우리 전승 문학 <구지가>를 봐도, 여러 사람의 입이란 쇠도 녹일 정도라고 하니 ㅋ

마지막은 사람들이 "아주 초라하게 늙은 사내의 손에 끼어진 반지를 보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인데, 제가 읽었던 아동판에서는 이처럼 원문에는 전혀 없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이 모시던 분인가요?"
"아뇨". 햐녀는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인님은 저 초상화에 그려진 분처럼 젊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어떻게 된 게, 저는 그 아동판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더 듭니다. 아마도 그 각색하신 분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너무도 몰입을 한 나머지 아예 자기식으로 창작까지 한 듯한데(ㅎㅎ), 이게 오히려 더 원작의 유미주의 분위기를 잘 살려서 그럴싸해지는 결말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영원한 경의와 애모의 메시지도 잘 살고 말이죠. 또, 죽고나서 신원이 밝혀지면 가뜩이나 생전에 평판이 안 좋았던 그레이가 말 그대로 "유취만년" 신세로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이런 변형된 결말은 그 아름다움을 봐서 행해지는 마지막 "사면(pardon)"으로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박혜정 작가님의 일러스트는 평소에 우리가 잘 알듯 날카로움과 퇴폐적 아름다움이 동시에 구현된 참으로 미묘한 그녀만의 스타일 덕분에, 혹시 이런 기획이 나온다면(아니면 팬 서비스 차원에서 혹시 그녀만의 각색판이 그려진다면) 최적의 작가겠다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이런 책이 나와서 놀랐습니다. 단, 일러스트가 좀 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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