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 가깝지만 정말 가까워져야 하는 나라, 일본! 일본 연구 시리즈 3
신규식 지음 / 산마루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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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어쩌다 저리 되었을까? 이는, 현재의 일본인들 처지가 예전 같지 않다거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혀를 끌끌 찰 만큼 비정상적이고 강박적인 성품이 다분하다는 뜻처럼 들리는 문장입니다(최소한 저는 그렇게 받아들인...).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 보니 꼭 그런 내용은 아니더군요. 세계인들이 보기에도 좀 유별난 구석이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 한국 사람 눈에" 왜 저처럼 특이한지, 혹은 (안 그러던 사람들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밝혀 가는 내용입니다.

이런 "특이함"에는 장점과 단점이 다 포함됩니다. 책의 전반부에는 주로 단점, 그 중에서도 끔찍할 만큼 섬뜩할 만큼 부자연스럽고 왜곡된 본성, 기질 등이 분석되며, 후반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한국인들은 예외로 치더라도)이 본받고 싶어할 만한 모범적인 품성, 행적, 업적, 그리고 위인(정치인 등 거물들도 있고, 평범한 시민들도 있습니다) 등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익히 알던 내용들도 있고, 오 이런 걸 몰랐었네 싶은 이야깃거리도 많으며, 다뤄진 모든 내용에는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관점과 통찰이 스며 있습니다.

일단 책 서두에는 끔찍한 자연 재해를 겪고도 질서를 지키며 타인을 배려하는, 거의 기적 같은 시민 정신을 보여 준 일본인들의 사례가 나옵니다. 고베 대지진(1995)도 그랬었고, 2013년에 일어난 동일본 대진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인들은 놀라면서 "지구 종말이 꼭 이런 모습이기만 하다면 (견딜 만도 하겠다)"고 소회를 피력했습니다. "이 바보들아! 폭동도 일으키고 불평불만도 쏟아내라고 좀!" 글쎄요. 멀쩡히 잘 하는 사람들더러 이런 주문을 하면, 그게 안타까움의 발로일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배경을 찾아야 할지, 뭔가 생각할 거리가 생기긴 합니다.

저자는 그들의 지난 역사에서 민족성 형성의 기원을 찾습니다. 주로 책에서는 오다 노부나가 집정 이후 혹독한 방식으로 국민들을 다스린 일본 정치 체제의 특징을 두루 살펴 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통치기에 벌어진 잇코잇키(一向一揆)는 불교 종파 중 하나인 일향종이 일으킨 대대적인 봉기였는데, 이는 노부나가뿐 아니라 유력 다이묘들의 압제와 종교 탄압이라든가, 여태 없던 무리한 중앙집권화 시책에 대한 반발 같은 게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죠. 여튼 이 과정에서 무자비한 진압이 이뤄지고, 한국 역사 같은 데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힘에 의한 질서의 강요가 대대적으로 전개됩니다.

"우는 아이와 지토에겐 당해낼 수가 없다(泣く子と地頭には勝てぬ)" 희화적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암울한 뉘앙스도 풍기는 일본 속담이죠. 저자는 단칼에, "힘 있는 자에게는 그저 굴복하고 들어가는 게 상책이다"로 새깁니다. 일본처럼 신분의 위계가 엄격한 사회에서 그야말로 빈손으로 시작해 최고의 출세를 이뤘다며 현대에 들어서도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지만, 병(兵)과 농(農)의 엄격한 분리를 강제하여 영원히 신분의 장벽을 쌓은 시책은 그가 비로소 도입한 것입니다(물론 그 이전에도 신분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으나 전국시대 들어 실력주의 풍조가 우세하면서 다소 누그러진 거지만).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일반 민중에 대한 지독한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한 참근교대(参勤交代)제의 도입을 통해 영주들에게도 숨 막힐 듯한 압제를 행사했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일가, 삼족이 몰살될 뿐 아니라, 그 목숨을 앗는 수단 또한 끔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징징거림이 통하지 않는 완전한 짓누름." 책에서 상세히 다루는 게 그리스도교, 주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측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에 대한 지독한 박해입니다. 어느 나라, 지역에서건 이교의 신앙에 대한 견제, 혐오, 백안시는 있어 왔고, 한국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지금은 국교로까지 떠받들어도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아주 뿌리를 뽑으려 들었던 역사가 어디에라도 있습니다. 허나 일본에서는 기어이 기독교가 착근하지 못하고 말살되다시피 했는데, 다만 수백 년 간의 박해를 무릅쓰고 지하에서 신봉해 오다 19세기 중반 개항 이후 쁘띠장 신부를 찾아온 이들의 실화는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신도를 죽이는 것도 그 방식이 매우 잔혹했습니다. 이런 혹형은 비단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된 게 아니라, 봉건 질서에 도전하는 모든 반항 분자에게 고루, 예외 없이, 그 촉수가 겨누어져, 설령 건의한 시책이 가납된다 해도 그 대표자만큼은 예외 없이 책형 등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앗았습니다. 이런 이들을 두고 의민(義民)으로 일컫는다고 하는데, 이 설명은 한국식의 "의병(義兵)"을 다룬 대목 바로 뒤에 이어집니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한번 정해진 승자에 대해 굴종하는 게 지저분하지도 않고 현명한 처신이지, 의병 따위가 다 무엇이냐?"는 게 일본식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는 여러 문헌에도 자주 드러나는데, 임진란 당시에도 왕이 몽진하고 지방 행정 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시 관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병이 일어나자 왜군이 꽤 당혹해했다고 합니다. 자기들 같으면 일반 백성들이야 바로 승자 쪽에 붙어 순종할 텐데, 아니 농부들이 뭐라고 무기를 잡고서 반항을 하느냐는 거죠.

임란 후 열도의 패권을 놓고 도요토미 잔존 세력과 덕천 측이 동서(서동)로 갈라져 세키가하라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사실은 유명한데, 이때 일반 백성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락을 까먹으며 승패의 향방을 구경만 했다고 전합니다. 이게 일본식 사고방식이며, 책에도 나오듯 미군이 이기면 가이진(外人) 쇼군(將軍)이라도 새로 모시고 숨을 죽이는 게 온당한 처신이라 믿는 겁니다. 한국인 같으면 대변에 이런 행태를 두고 면상에 침이라도 뱉고 싶을 텐데, 일인들은 이에 대해 전혀 마음의 갈등이 없고, 오히려 윤리적 처신으로까지 간주합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예컨대 막부가 완전히 망하고도 그 대의를 계승하려 든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이 홋카이도에서 끝까지 항전한 건, 그 나름의 기개를 증명한 사건이며, 정해진 승자에 대해 무조건 부화뇌동하는 비굴한 근성이 일본 민족성의 전부는 아님을 떨쳐 보인 예라고 여깁니다. 중국에서도 이미 진(秦)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했지만 육국의 유신(遺臣)들이 자객을 보내어 제 주군의 명예를 도모하려 드는 등, 현실 정치에서 이미 대세가 기울었는데도 아랑곳않고 절의를 지키려는 멋진 패턴은 동아시아사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박은식 선생의 국성(國性)론도 물론 경청해야 하지만 이런 "의병"은 비단 한국만의 고유 유산, 전통은 아니겠죠. "의병" 자체야 고유명사라 쳐도 말입니다.

저자는 일본 불교 역시 석가 본연의 가르침에서 크게 일탈한, 바로 자라지 못하고 모습이 일그러진 흉한 기형의 나무에다 비유합니다. 대처(帶妻)가 예외도 아니고 일반적인 행태인 건 오직 불교밖에 없죠.  근데 저는 이 점은 각국의 사정에 맞춘 개성의 발현으로 봐 줄 여지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다만, 세상에 가미(神)가 우선이고 부처가 뒤라는 식의 궤변 같은 신불습합론을 들먹거리는 건 일본밖에 없긴 합니다. 여기서도 종파에 따라 다른 입장이겠으나, 여튼 사회의 지배적 분위기가 불교 원형을 크게 훼손하려 들었던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일본 불교"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일본 불교를 바로 자라지 못하게 한 그 분위기"가 나쁘다는 겁니다.

후반부에서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스레 내놓을 만한 위인들의 퍼레이드가 열립니다. 일본의 에디슨이라 불리는 다나카 히사시게,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공을 인정 받아야 한다는 니노미야 주하치, 티벳 인들을 탄압하는 중국에는 투포환을 공급 않겠다는 츠지다니 장인, 맥주의 달인 에비하라 씨, 싱가포르 수상도 존경했다는 어느 구두닦이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듯하면서도 세상 누구를 향해서도 의기와 신조를 굽히지 않는 일류들의 통쾌한 사연이 이어집니다. 어느 사회나 민족, 국가에도 빛과 어둠 양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책을 읽고 그들의 양면성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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