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로 빼돌린 검은 돈 이야기 역외탈세
장보원 지음 / 삼일인포마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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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외(域外) 탈세란, 해외의 조세회피처(tax heaven)을 이용해서 세금 납부를 회피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과거에는 "조세피난처"란 말을 즐겨 썼는데, 국민(혹은 거주자)의 당연한 의무 수행 행위가, 무슨 긴급히 피해야 할 "난(難)"이 될 수는 없으므로 요즘은 이처럼 바로잡아 쓰고 있습니다.

이 책 p1에서는 먼저 "조세회피처"란 바른 용어부터 제시하고, "해외로 소득 등을 유출시켜 탈세하는 행위"로 이른바 역탈을 정의합니다. 역외탈세가 간단히 "역탈"로 줄어 통용되는 현상(p14)만 봐도, 이런 행태가 의외로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한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책에서는 2016년에 이은 2017년의 국제 탐사보도 언론인협회의 폭로를 잠시 언급하는데, 아마 한국인들에게 가장 충격을 준 건 지난 2013년 뉴스타파(역시 ICIJ와 긴밀한 연계를 맺은)의 폭로였을 겁니다. 당시 모 금융기관 K 사장, 유명 연예인 Y씨, 대기업 이사 L모씨, 교육자 C씨 등 다수의 (이른바)사회 지도층이 혐의를 받았었죠.

이 책은 저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사회에 은연중 만연한 어떤 범죄행태를 고발하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런 파렴치한 행태에 대해 우리들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인식이 퍼지면 뻔뻔스럽게 탈세를 저지를 엄두를 (그들이) 덜 내겠지만, 그보다는 재미있는 소설 형식으로 된 책을 읽어가며, (꼭 역탈 같은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도) 세무 전반에 대한 상식이 크게 느는 보람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강재라는 핸썸하고 전도 유망한 사업가가 차린 사업체가 본의 아니게(?) 국세청으로부터 "역탈" 혐의를 쓰고 궁지에 몰리는데, 이를 우리의 주인공 장태란 세무사가 도와 주며 겪게 되는 다양한 사건(아주 전형적이라 할 세무 관계 트러블들이라서,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을 재미난 이야기처럼 엮은 내용입니다. 뭐 주인공 중 하나인 이강재 대표님이 결국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등 아주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미모의 장 세무사님과 묘한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등 소설적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장태란 세무사님은 벌써 서른 후반이지만 일만 하고 살아온 베테랑이라서 여태 연애 같은 연애 한 번 못 해 본 불쌍한, 그러나 주변에서 한 미모한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 화려한 싱글입니다. 이 정도면 "화려한"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게, 평범한 세무사도 아니고 국세청, 검찰청, 관세청 등에 외부조력인으로 출입한 바 있고, 여러 알짜 기업을 고객으로 상대하며 그간 수입도 꽤 높이 올린 것으로 짐작되는 유능한 전문직이기 때문입니다. 경력이 이 정도면 세무사 중의 세무사라고 봐야겠죠.

이 약력을, 한 번도 아니고, 책 서문은 물론 본문에서도 두 번이나 강조하는 걸로 보아 작가님(일부 페르소나를 장태란에게 분명 투영한, 현직 베테랑 세무사이고 나이도 비슷하지만 남성이십니다...)이 그 세팅에 아주 공을 많이 들이신 듯합니다. 14년 경력 기준을 잡는 시점이 2016년이니 집필(혹은 구상)에서 출간까지 2년 가까이 소요된 것 아니겠습니까.

after all these years 같은 감상 지긋한 어구가 서두부터 대뜸 나오는 통에, 와 과연 역탈이 소재인 만큼 작가님이 영어 표현에도 참 능하시구나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고 아델의 노래 가사라고 나오더군요(...). (이 구절은 p130에 한 번 더 반복되고, 저 뒤 p122, p184에는 다른 노래 가사가 또 소개됩니다 ㅎㅎ)아무튼 시작은 장태란(이하, 직함은 생략하겠습니다... 만 캐릭터에 애정이 가서 계속 호칭을 높여 드리고 싶어요)의 회상으로 열립니다. 결말에 가서, 이강재 전 대표가 더 세련된 모습으로 (집행유예로 일단 미국에 갔다가) 장태란과 멋지게 해후하는 장면(발단과 동일 시간대)도 나오기 때문에, 뭐랄까 구성상의 묘도 빼놓지 않고 갖춘 셈입니다.

홍학익 회장은 대뜸 소리를 지릅니다. "뭐 그런 엉터리 규정이 다 있노?" 이 소설에는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 중반쯤에 가서 우리 이강재 대표님 회사에 검은 양복 입고 조사 나오신 황도엽 팀장님도 그렇죠. 홍회장이야 감자(減資. p29에 자세히 나오죠)를 먹는 감자(potato)로 아는 무식한 분이고, 반쯤은 이런 무식, 반쯤은 정말 범죄 행위(상습횡령이라고 뒤에 나옵니다) 때문에 감옥에 가도 별 동정이 안 갑니다. 헌데 낭만도 있고 머리도 좋고 뻔뻔한 기질도 왠지 밉지 않은 이강재 같은 사업가가 젊은 나이에 "빵"에 들어가는 건 좀 안돼 보이긴 합니다. 제 주변에 누구는 "3년이나 살았다면서 집행유예는 또 뭐냐?"고 하던데 일단 불구속 기소로 시작은 했으나 1심에서 바로 실형이 선고되고(소위 법정구속) 항소심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면 이럴 수가 있죠.

아무리 잘나가는 세무사라고 해도 통 연락 없던 누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올 때, 이렇게 쓸모가 생길 때에만 연이 이어지는구나 같은 무상감을 느낄 수 있겠죠. 이런 use(사용)에 대한 좀 쓸쓸한 소회가 이 소설 속에서 두어 번 나오는데, 사실 세무사 같은 전문직(자유직종)은 고용(雇用) 혹은 사용(使用)이 아니라 위임(委任)이라고 하죠. 물론 로마법(혹은 독일 민법)에서 위임은 어디까지나 무상위임이 원칙이었으나(따라서 자유재량이 허용됩니다), 한국처럼 변호사건 세무사건 fee를 받고 일하는 게 대다수인 이상 일반 피용인과 다를 바도 없다는 게 현실이긴 합니다.

p43에 "간주배당"이 나오는데 위에서 홍회장이 버럭 화를 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반면 주식 소각, 잉여금 전입 등의 경우에 적용되는 건 세법상의 "의제배당"이며, 지금 이건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 규정에 의한 것이죠. 용어가 서로 비슷하므로 일반인들이 헷갈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배당이 아닌데 배당 취급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습니다. p37에 보면 주식이나 부동산 명의신탁이 어떻게 민형사상 제재를 받는지 자세히 설명되고도 있습니다. 다들 홍회장 같은분이 싫어하실 만한 제도들입니다.

2016년 당시 사정을 잘 반영하듯 해운업계의 구조적 특성(경기를 심하게 탐)에 대해 여러번 설명이 나옵니다. 본디 이 바닥은 심한 호경기와 불경기가 교차하게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8년 전 글로벌 위기의 여파로 해운사들이 더욱 심한 곤경을 겪는다는 분석(설정?)을 덧붙입니다. 톤세 제도에 대해서도 장 세무사 등의 소상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이 많이 배울 수 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유독 저 2008년에는 우리 정부 당국이 딴에는 선의로 도입, 권장한다고 한 게 기업들에게 치명타를 안긴 패착이 많았습니다. 키코(Knock-In Knock-Out)도 그랬고요.

이강재 대표는 p63에서 부당행위계산부인에 대해, "왜 상대회사는 액수 그대로 매출을 인정하고 과세하면서, 당사자에게는 경비 인정을 안 해 주느냐"고 묻는데, 이건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매출액이야 납세자가 그리 신고를 헸으니 과소(過少)가 아닌 이상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고, 경비 인정 범위 문제는 본래가 정책적 고려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사업수완이 탁월했던 아버지(p87, p201)에게서도 이런 건 안 배우셨나 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역탈 이슈 하나만 다루는 게 아니라, 사업 하면서 마주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세무 난관이 자세한 사이드 설명과 함께 재미있게 다뤄지기 때문에, 읽으면서 상식도 많이 늘고 공부도 됩니다. 소설류에서 대화 부분은 대개 따옴표 안에 발화자의 구분도 없이 독자가 알아서 추론해 가야만 하는 비능률적 형식으로 처리되지만, 이 책은 각종 세무, 법무 서적 출판을 통해 보기 좋은 편집에는 이력이 난 삼일인포마인의 솜씨라서, 지금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방백)인지 대화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독자 입장에서 아주 편합니다. "게임 안에 또 게임이 있다."던 이강재의 대사도 명언이고, 지전무(나중에 대표이사가 되지만 결국 물을 먹죠) 같은 캐릭터가 사회에는 꼭 있고, 이런 실감 나는 인물 묘사 덕분에 소설이 유익하고도 재미있었습니다(이강재의 영웅본색과 해피엔딩- 세상 참 좁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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