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라이터
사미르 판디야 지음, 임재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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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중국보다도 더 많은 인구를 가졌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고, 동셔양에 고루 끼친 방대한 문화적 영향 때문에라도 엄청 중요한 나라입니다. 이런 인도만의 지방색이, 인류 보편 관심사와 정서, 주제와 맞닿을 때 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편이었다고 저 개인적으로 기억됩니다.


소설은 한 남자의 회고로 시작됩니다. 진로를 마땅히 정하지 못해 바황하던 대학원생 시절을 되돌아보는 문장인데, 소재가 된 시간적 배경과 집필 시점(실제 작가의 집필이든, 아니면 가공 인물인 라케시의 기준에서건)이 꽤 차이가 나는 듯합니다. 결말에 가서 보면 "문제의 그분이 맞은 어떤 운명(내용 누설이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겠습니다)"이라든가, 이후 1인칭 화자 라케시 신상에 닥친 상당한 변화(어떤 것은 그가 간절히 원하던 것, 어떤 건 그가 끝내 피하고 싶던 것)가 자세히 나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줌파 라히리의 작품 세계와 비견하던데, 저는 오히려 얀 마텔(인도인은 아니지만)의 <파이 이야기>와 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봐, 그건 젊은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치고는 너무 암울한 전망 아닌가?"

완성도 높고 공감을 끌어내는 소설은, 주제 자체의 무게도 무게지만 이처럼 캐릭터 간의 소통이 실감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탐독과 감상은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훈계(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청취와는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독자 생각에도 저 말이 나와야 하지 싶은 바로 정확한 타이밍에 딱 맞는 코멘트를 던져 주는 (사실상 주인공인) 아닐 작가의 한 마디를 듣고(읽고), 가뜩이나 흥미진진했던 작중 세계에 한층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생후 몇 개월도 채 안 된 시기에 시력을 완전히 잃고(화자 라케시의 말에 따르면 "뭔가 기억의 편린이라도 부랴부랴 챙기기조차 너무 이른 시점"), 이후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간 위대한 정신. 이미 사회로부터 확립된 평판을 받은 분이라지만 왠지 자신만의 세계에 꽉 틀어박혔거나, 상처가 깊은 만큼 편견(무엇이든 간에)에도 단단히 사로잡혔을 것만 같은데, 전혀 아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었다는 뜻입니다.

육안이 멀었으면서 오히려 심안이 널리 뜨인 현자의 원형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테이레시아스 같은 캐릭터가 있겠습니다. 작중의 문호 아닐도 그런 유형이겠는데, 불편한 일상을 도와 주려 시급을 받고 일하게 된 알바생 라케시는 오히려 이 늙은 지성인과 함께 지내며 단단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저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았을 뿐 구체적으로 아닐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그는, 채용 즈음에 그의 책을 비로소 읽어가며 이 거인의 생에 대해 촘촘히 공부합니다. 본래가 영민한 자질의 젊은이였던 만큼 책도 빨리 읽어 내고 인물 학습의 속도도 신속하지만, 앞으로 그가 이 위대한 정신과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깨우칠 경지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습니다.

"요즘은 뷰익 같은 미국 차를 잘 안 타나 보지?" <양들의 침묵>의 연쇄 살인마 닥터 렉터는 수감 중에도, 면회 온 스탈링의 체취만 맡고서 그녀의 출신 배경까지 다 밝혀 내는 신기를 과시하죠. 특정 감각(특히 시각)에 장애가 생기면 다른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나 그렇지 어디 장애인이라고 모두 타 감각의 보상을 받겠습니까. 그런 기제가 개체의 예외 없이 공통이면 장애인이라고 딱히 불편할 바도 없으니 누구나 장애인 되게요 어디. 이 아닐은, 타고날 때부터 명철한 정신을 갖췄기에, 엔진 소리만 듣고 차종까지 분별해 내는 신통함을 보일 수 있는 겁니다.

상경계를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고(라케시는 학창 시절 내내 일등을 안 놓치던 수재라고 나옵니다) 금융회사로부터 좋은 자리까지 제의 받았던 청년은 단지 "나의 진짜 꿈은 글쓰기"란 낙관 하나로 좋은 기회를 흘려 보냅니다. 내심으로는 그의 부친이 "녀석아,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야!"라며 따귀라도 후려쳐 주길 기대했지만, 자신만큼이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부친이야 그 아들이 "알아서 잘 하기를 바랄뿐" 그런 적극적, 월권적 훈육에 나설 리 없었죠. 영리한 아들이 이 또한 모를 리 없건만 이런 햄릿 형은 언제나 "이뤄지지 않았고 이뤄질 수도 없었던 가능성에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눈먼 거인에게 "또다른 아버지상"을 기대했던 라케시는 왜 지원했느냐는 질문에 "돈이 궁해서요."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라케시는 여러 번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잘 하는데, 독자들도 알고 작중 인물들도 다 알듯 그 전부가 "화이트 라이"일 뿐입니다. 라케시가 얼마나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지 이 현인, 그리고 현인의 젊은 아내가 모를 리 없습니다. 라케시가 처음 아닐의 저택을 찾았을 때 우선 놀란 건 그 젊은 아내 미라의 놀라운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나와 남편이 너무 나이 차가 많이 나죠?"라는 질문에 대뜸 부정부터 하는 것도 그의 "귀여운, 그리고 속 뻔히 보이는 거짓말" 중 하나입니다.

라케시는 아닐에게서 "제2의 아버지"를 기대하는 건 우리 독자들 눈에 뻔히 보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하나 눈에 띈 건, 은근 이 라케시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채 극복 못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라케시는 어머니에 대해 채워지지 않은 애정과 배신감이 그 마음 속에 혼재해 있습니다. 사춘기, 혹은 그 이전 단계 애들이나 겪을 이런 혼란스런 상태로부터, 이 똑똑한 대학원생이 아직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그 어머니의 잘못이 큽니다. "슬립 바바"라는 현자(라고는 하나 이런 류의 사이비 종교 창시자가 인도 국적자 중에 많았죠. 바다를 건너와서까지 포교하며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다 봉변을 겪기도 한 실존 인물 중엔 오쇼 라즈니시 같은 이도 있었는데, 다 이 소설의 시대상을 반영합니다)에게 빠져 기어이 가출을 한 라케시의 모친. 행여 어떤 선을 넘지는 않았으면 하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지만 가능성이 현저히 낮음은 자신도 잘 압니다. 소설 후반부에 가면 이 바바와 라케시의 만남까지 이뤄집니다. 이 상처가 잘 마무리되어야 헬렌하고도 진도가 빠질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라케시가 미라를 바라보는 시선에 각별한 열정이 실린 건 이런 굴곡 있는 개인사, 가정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제 느낌입니다. 물론 미라는 (라케시의 뜨거운 주관적 묘사가 아니라도) 누구 눈에도 아름답게 비칠 만한 미인입니다. 이런 미인을, 나이도 많고 눈도 멀었으면서 장악할 수 있었던 아닐이야말로 작업의 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습니다. 사실 아닐은 눈만 멀었다뿐, 체격이 탄탄하고 현란한 말빨을 자랑(머리가 좋으니 당연하죠)한 덕에 장애인이면서도 여자들에게 성장기 동안 인기가 좋았나 봅니다(게다가 부잣집 아들 ㅋ).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의 각별한 "크기"라는 사정도... (더 이상은 생략하겠습니다)

아닐은 특이하게도 "사회주의 중국 VS 소위 민주주의 인도" 중 전자를 더 옹호했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시대상이 드러나죠. 얼마 전에도 두 나라가 군사적 대립으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빚었는데 만약 아닐이 요즘 사람이었다면 (딱히 조국에 대해 원한을 품은 출신도 아닌데) 정치적으로 저런 스탠스를 품을 이유가 없었을 텝니다. 라케시는 옆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읽어 주는 일을 하려고 고용된 건데, 예컨대 GQ에 실린 모델이 신디 크로포드라고 가르쳐 준다든가요. 이 무렵이면 어떤 잡지에도 ("수퍼모델"이란 말을 처음 대중화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그녀만 실릴 시절이죠. 재미있게도 작중의 아닐은, 신디 크로포드와 직접 만나 인사까지 했다고 말합니다ㅋㅋ

"페드로는 메츠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야(p55)." 이 무렵은 우리도 박찬호 때문에 메이저리그를 한창 지켜 볼 때였죠. 메츠와 양키가 나란히 각각의 플레이오프를 치를 무렵이면 1999년입니다. 이때(이 직전) 메츠에 있었던 "페드로"가 누군지 모르겠네요(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우리가 잘 알듯 이무렵 보스턴에 있었구요). 여튼 "빌 클린턴이 나한테 욌으면 여자 관련 절제하는 법을 가르쳐 줬을 텐데" 같은 말로 보아 배경은 거의 확실합니다.

아닐 트리베디는 이 픽션 속에서 필립 로스(며칠 전인 2018. 5. 22에 타계했죠), 가르시아 마르케스, 레이먼드 카버 등과 함께 놓이는 위상입니다. 눈먼 노인과 함께 지내며 자신의 성장까지 함께 이루는 소년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우리에게 친숙한데 예컨대 영화로 잘 알려진 <여인의 향기> 같은 게 있었죠. 야구 이야기부터 해서 끊임 없이 시사에 대한 수다가 오가는 장면으로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매우 익숙합니다. 따뜻한 서사와 분위기이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의외의 파격까지 결말에서 예비하는, 그러면서도 분량마저 부담이 안 되는 적정 수준이라서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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