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맑스 - 엥겔스가 그린 칼 맑스의 수염 없는 초상
손석춘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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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라든가 지음(知音)의 고사에서 잘 보듯, 서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아껴 주며 존중하는 친구 간의 우정은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리곤 합니다.

칼 마르크스(이하, 책의 표기에 맞춰, 또 저자 손석춘 선생과 같은 연배이신 모든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의 공감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써 "맑스"라고 쓰겠습니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우정과 교분도 또한 이와 같았는데, 관포를 놓고 볼 때 관중 쪽으로 아무래도 능력의 추가 많이 기울고, 뛰어난 감상자, 평론가인 종자기보다는 연주자 백아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던 사실과 달리, 맑스와 엥겔스(이 팩션의 공동 주인공이자 1인칭 내러티브)는 사회학(뿐 아니라 인접 모든 학문에 두루)사상 엥겔스의 비중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각에서 맑스의 학문적 업적은 그간 사회상이 격변한 까닭에 그저 "역사적" 가치만을 고려할 뿐이라고 낮춰 말하기도 하나, 엥겔스의 노작과 자취에 대해서는 (워낙 이분이 방대한 영역에 걸쳐 연구를 남긴 까닭에) 그리 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2008년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큰 약점을 노출하고, 누구나 열심히만 일하면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과 지표에 큰 상처가 남겨질 만큼 양극화가 많이 진행된 작금에, 뜻밖에도 칼 맑스의 사상과 학문 체계에 다시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끈 피케티의 저작은 (본격 경제학 서적인데도) 그 자체가 맑스의 대작에 대한 오마쥬 구실을 겸했으며, 현재 극장가에는 <청년 마르크스>라는 영화가 상영관에서 뜻있는 관객들과 소통하는 중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 우국지사였던 심산 김창숙을 기려 특정 대학교 학생들이 "청년 심산"을 현창하듯, 혹은 철학도들이 (서양인 중에서도 천수를 다 누렸다 할 만한) 헤겔을 두고 "청년 헤겔"을 기리듯(이 책 p29, p30, p46 등에도 나옵니다), 맑스 역시 그 짧다 못할 수명(1818-81이라서 외우기가 편합니다. 또 보시다시피 올해가 탄생 200주년입니다)에도 불구하고 "청년 맑스"란 호칭이 참 익숙합니다. 80년대 학번 어르신들 사이에선 동아리, 토론회 명칭으로도 눈에 선한 구절이기도 하죠.

반면 마땅히 배워야 할 걸 못 배운 밑바닥 노파의 비천한 라면사리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 어쩌구를 떠들다가 뒤늦게서야 현재의 모든 진보 동향이 이에 아득한 기원을 두고 있다는 걸 눈치 챈 후 재빨리 "폭력이 문제였다느니 뭐니"를 떠들고 얼버무리지만 말입니다. 하긴 이런 극단의 밑바닥 근성과 저능이 가장 심각한 폭력의 변이 형태이기도 합니다. 아마 노동 계급이 주도하는 혁명 운운하는 게, 자신이 가상으로 속했다고 착각하는 부유층 타령(1000퍼센트 헛소리입니다)과 잘 안 맞고, 다음으로는 워낙 어리석고 저능해서 웬만하면 한 번 정도는 공부했던 사회과학 트렌드에 단 한 번도 끼지 못한 한심한 처지였기 때문이죠. 남들 마땅히 거칠 걸 못 거친 인생은 이래서 불행하고 비참하며, 마침내는 가정까지 파탄이 나게 마련입니다.

칼 맑스의 저작은 날카롭고 정확한 통찰로도 물론 유명하지만, 그 표현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중의적 구조를 지니고 서양의 고전을 일일이 오마쥬하는 듯한 절묘한 풍취가 또한 일품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사장과 경전에 두루 능한 진정한 문사라고 할 수 있었겠죠. 이책 p46을 보면, 학생 시절 귀족과 결투를 벌이다 눈 위의 작은 상처 정도로 마무리된 "사고"를 두고, 작중 화자 엥겔스(물론 진짜 엥겔스가 아니라 손 선생의 페르소나입니다)가 하는 말이 일품입니다.

"자네를 살려 준 신께 감사할 뿐이네. 자네가 그때 죽었더라면, '종교는 아편'이라는 명구절이 아마도 탄생하지 못할 뻔하지 않았는가?"

신이 혹시 세상을 다채롭게 가꾸는 게 진짜 목적(그렇다면, 좀 이상한 분이군요)이라면, 1838년에 혹시 실수로 그를 살려 둔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누가 알겠습니까. 근데, 비슷한 해에(지리적으로도 가깝네요) 수학 천재 에바리스트 갈루아를 (역시 결투의 현장에서) 냉큼 어린 나이에 데려가신 걸 보면, 아마 이 천재는 수학사상 큰 업적을 더 이상 못 남기리라(할 일 다 마치고 천재성이 조로함) 여기시고 그리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갈루아가 몇 살 형이고 급진 공화파였음을 감안하면 실제 둘이 못 만난 게 아쉽기도 한데, 역시 모두가 신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에바리스트 갈루아보다는 좀 험악하게 생긴 맑스는, 엥겔스에게 평생의 지기였을 뿐 아니라, 마치 김승옥을 김현이 경탄했듯 일종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면이 있습니다. 출신 성분에서 앞서고 그 자신 역시 일세의 지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 면에서 "신으로부터 받았다고밖에는 말 못할" 천재성을 보면 과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1장을 보면 "악마가 된 랍비"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칼 맑스는 유대인이었고(물론 유대교와는 거의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이상 세속적일 수도 없을 철저한 반종교주의자였습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유독 사상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결벽증, 혹은 교주적 카리스마 같은 게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프로동의 <빈곤의 철학>을 신랄하게 비꼬며, <철학의 빈곤>을 통해 자신의 사상 일단을 나타낸 데뷔가 대단히 인상적이었죠. 이 과정에서 그는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를 극복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로 무장하여 "역사의 필연"을 대비하자고 역설합니다. 이 책에서 화자 엥겔스(사실은 저자 손 선생)는 "그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는 오히려 기독교적 박애주의와 한 손을 잡는 게 보통이었는데, 맑스 이후 사회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 나아가 과격 혁명 노선'으로만 인식되며 기독교와는 영영 절연하게 된 사정을 잠시 언급합니다.

예전에 누가 케인즈에게 "혹시 <자본론>을 읽어 본 적 있냐"고 묻자,  "아니다. 물론 나는 <코란>도 읽은 적 없는 사람이다."라고 대꾸했다는 일화가 있죠(이 이야기는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에도 소개될 정도입니다). 사실 맑스를 보면 저 이란의 故 호메이니라든가(특히 덥수록하게 기른 수염이라든가 형형한 안광 등), 현재까지도 그를 추종하는 여러 아야툴라들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습니다. 셈 족 특유의 옹고집, 외골수 기질 등이 긴 세월의 침식에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p107에 보면 아내 예니 폰 베스트팔렌(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귀족 출신입니다)을 가리켜 "예니헨"이라 불렀다는 맑스의 버릇이 소개되죠. -chen은 독일어에서 흔히 쓰는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이죠. 박식한 손석춘 선생께서 본문엔 일일이 설명도 달아 주십니다. Mädchen(소녀), Hündchen(강아지) 같은 중성명사에서 저런 예를 잘 볼 수 있죠.

p207을 보면 손 선생의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로 들어갈 때 우리가 신사의 나라에서 악마로 살리라곤 전혀 예상 할 수 없었지. 물론 앞 문장에서 "악마"와 "신사"가 들어갈 자리가 살짝 바뀌었지만 말이야." 세련되고 빈틈없는 신사의 매너 속에, 타인과 약자를 사정 없이 갈취하여 눈부신 세계 제국을 이룬 당대 영국의 거대한 위선과 음모를 빗댄 구절이기도 합니다. 악마와 싸우다 보면 오히려 천사가 검댕과 오물을 뒤집어쓸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메리와 칼도 금슬이 참 좋아 여러 아이를 둔 사실이 유명한데, 음악의 아버지 바흐도 빈민굴에서 살며 아이를 여럿 두어 고생을 자초하기도 했죠(사실 바흐는 좀 경우가 다른, 무책임하고 잡스러운 가장의 일면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책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실제로 부유한 자본가의 아들이었던 엥겔스가 이런 그의 가정에 자주 원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p384에 보면 헨리 하인드먼의 말을 빌려 "엥겔스는 런던의 달라이 라마"라고 한 평가가 나옵니다. 20세기 초라고 해도, 티벳 불교의 달라이 라마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교황" 처럼 성직자(를 넘어 생불)의 직분명(을 넘어 生佛)이므로 작중 화자 엥겔스는 "내가 만약 달라이 라마라면, 자네는 붓다가 아닌가!"를 외칩니다. 사실 생전에 그토록 종교를 혐오한 그들이었지만(경쟁상대라서?), 세월이 지나도록 그의 추종자, 혹은 객관적 관찰자들도 어느 정도 종교 지도자를 바라보는 외경감과 신비감으로 그들을 대하게 되는 건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맑스나 엥겔스 못지 않게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시는 손 선생의 깐깐한 스타일과 재치는 책 여러 곳에서 묻어납니다. 예컨대 "노동자"는 "노동인"으로 바꿔 써야 한다거나, "독불연보"는 "독프연보"로 달리 불러야 한다는 대목 등이 그것입니다. 촛불 혁명의 먼 기원은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는 1980년대 학생 운동이며, 이것이 2016년에 이르러 드디어 최종적 복권을 이룬 셈입니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새로운 마음으로, 차라리 "우리들의 1980년대'를 회상하고 채색하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한국적 현실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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