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 헤드 철도 네트워크 제국 1
필립 리브 지음, 서현정 옮김 / 가람어린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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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4차 산업혁명이 흔히 이야기되지만, "기차, 철도"는 제2차 산업혁명을 이끈 중요한 혁신이었죠. 새로이 발명된 철도가 그전까지 서로 떨어져 있던 여러 지점을 연결하자, 일부에서는 "온갖 악을 전파하는 악마의 도구"로 폄훼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엄청난 하중을 지고서도 쾌속으로 운행하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이 철도의 마력에 흠뻑 빠져 열광하는 층도 새로 생겨났죠. 현재까지도 소위 "철덕(철도 덕후)"들이 많은 건 (다른 오타쿠층과 달리) 제법 오랜 문화적 연혁과 내력을 지닌 셈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엄마를 잃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 헤매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은하철도 999"가 잠시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미국 웨스턴 장르 영화를 봐도 기차는 꼭 무법자들에게 피해를 입거나, 낯선 고장에 설치된 정류장에서 큰 사고의 발단이 생기거나 같은, 다소 불안하거나 어두운 이미지, 심상과 곧잘 연결됩니다. 그러나 바로 눈에 띄지 않는 여백의 공간에 훨씬 많은 희망을 숨겨 두기도 했고, 그걸 떠나서도 그 힘차게 뿜어대는 기적과 엔진음만으로도 탑승자들에게 가능성과 꿈을 품게 하는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기존의 SF(뿐 아니라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지만)에서 철도, 기차가 그저 사람의 운전과 조종을 받아야만 하는 무정물,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했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녀석들은 (우리 시대가 새로 가지게 된 비전에 힘 입어) 인공 지능이 장착된, 더 특별한 존재로 거듭납니다. 물론 주인공들, 주로 어린 층이 감정이입할 수 있을 멋진 인물들도 많이 나오지만, 이 소설에선 스스로 판단하고 느낄 수 있는 기차들이 캐릭터의 자격으로 대거 등장한 게 큰 매력입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젠 스탈링은, 마치 <스타 워즈>에서 스스로(혹은 몇몇 스승들의 도움으로) 각성하여 광막한 우주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루크처럼, 지혜롭고 용감한 성격입니다. 단, 루크와는 달리 젠은 그간 속해 있던 나쁜 환경 때문에 좋지 못한 습관과 성격에 물들어 있기도 한데, 마치 <은하철도 999>의 메텔처럼(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그의 부족한 부분만을 딱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이런 장르에서 우리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기대할 만한 "성장"을 이뤄 나가게 됩니다. 어디까지가 타고난 천품의 덕택이며, 또 어디서부터가 후천적 의지, 혹은 주변의 도움일지는 작품마다 제각기 다른 선택이긴 한데, 일단 이 1권에서 우리 독자들은 젠의 거침없고 (불량청소년다운) 경쾌한 행보에 속으로 쓴웃음을, 겉으로 통쾌하게 응원을 함께 반응하게 되더군요.

예전에 <은하철도 999>를 보며, 저 키 작고 충성스러운 차장은 열차 자신의 화체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인체형 아바타" 없이도 기관차가 스스로 행동과 판단과 개성을 지니고 인물들과 소통합니다. 인체형이 아닌 유닛에서 작동이 원활한 모습을 봐야 비로소 AI의 진가를 평가할 수 있는데, 이때 성능과 가치란, 거기다가 인간적 존엄까지를 우리가 (진심에서) 부여할 수 있을지까지가 포함되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녀석들은 "무력과 가차 없는 성격" 때문에 힘 없는 하층의 부스러기 같은 부류에게는 그런 여유를 허용도 아예 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스타워즈>를 보면 외양도 가지각색이지만 그 출신 배경 역시 천차만별인 여러 캐릭터들, 생명체들, 로봇들이 등장해서 관객을 매혹했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마찬가지죠. 질서도 흔들리고 사회악은 19세기에서 별반 나아질 바도 없이 여전하고, 소설 내내 암시되듯 뭔가 심상찮은(불길한) 일이 분명 배후에서 꾸며지는데도 이 우주가 아름답게 다가오는 건, 바로 캐릭터들이 제각각의 개성을 뽐내며 세계를 점유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도 되는 체험이었습니다.

"다들 모토릭에 지나지 않지."

젠이 이 대목에서 당황한 건, 저 말을 하는 노바가 마치 자신은 그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투였기 때문입니다. 젠이 되묻죠.

"넌 네가 모토릭이라는 걸 알아?" (몰라?라고 묻지 않는 게 좀 특이한데, 영어에서는 이 경우 뉘앙스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난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만, 그들은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이라고 해도, 그저 대세에 따라 움직이고 이익을 위해 영합하며 때에 따라 말과 소신이 바뀐다면 그의 존엄은 어디서도 찾을 근거가 없습니다. 모토릭으로 태어났어도 후천적으로 제 의지에 따라 존엄을 가꾸었다면, 그런 존재야말로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불로불사의 존재 레이븐은 유독 이 젠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거기서 빠져 나오려면 총까지 쏴야 하나요?"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지."

사람의 생각이란, 혹 100이 필요하다고 할 환경에서, 고작 3, 4 정도를 예견하고 살피는 데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도 자신에게는 꽤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 정도만으로도 200 이상의 준비가 마쳐졌다고 착각(자기 기만)하는 게 또 타고난 생리입니다. 하지만 레이븐은 이 정도의 준비로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며, 다만 어린 젠에게 괜한 부담을 줄 필요야 없음도 꿰뚫기에 저 정도로 얼버무립니다.

앞에서 기차의 경적 소리만으로도 철도 덕후, 혹은 철도에 아무 애정 없어도 무엇인가 이유가 있어 이 거대한 탈것(vehicle)에 오른 모든 이들에게 괜한 설렘을 느끼게 한다고 적었습니다. 덕후건 아니건 이 순간만큼은 기차가 노래를 부른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 소설 속에서는 정말로(비유가 아니라) 기차가 운행 중 노래를 부릅니다. 황제와 그 일가들이 탑승한 기차에서 이제 뭔가 일을 벌여야만 하는 젠은 잔뜩 긴장해 있고, 그런 젠을 노바는 계속 다독입니다.

"이 기차, 정말 좋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금을 받아 주는(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가 필수겠지요) 상점을 찾아다닌 젠은, 3D 프린터로 총 한 자루를 뚝딱 만들어 구입합니다. 웨스턴을 보면 마침내 자유를 찾은 무법자가 대뜸 처음 발견한 총기 소매점에 들러 이것저것 쑤셔 본 후 마음에 드는 걸로 (부품 몇을 교체해 가며) 고른 후, 돈도 안 내고 총포상을 엉망으로 만든 후 유유히 빠져나오는 장면이 많죠. "3D 프린터"라고 이름은 안 붙었으나 여태 SF 장르에선 그 비슷한 설정이 많았습니다. 일개 좀도둑에서 총기도 슬슬 만져가며 더 간 크고 실력(?) 좋은 무법자로 성장(!)하는 젠을 보며, "어차피 세상은 거친 곳이니 사소한 불편과 고통에 굴복하지 말라"며 애들(젠보다 훨씬 어린 꼬마 때부터)을 강하게 키우는 저쪽 동네 분위기가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아나이스 식스의 인터페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낮은 천장 아래에 서니 훨씬 더 키가 커 보였다."

인터페이스란 개념은, MS가 GUI를 만들어 전세계 가정과 개인에 일상 용품으로 보급한 이래 SF에도 역수입되어 더 자주 만나는 듯합니다. 아바타가 있고 그 아바타를 통해서만 소통하면, 유비쿼터스의 시대에 사실상 본체와 대리인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유독 이 작품에서는 이걸 칼같이 따지고 드는 게 돋보였습니다. 젠은 아마도 가짜와 진짜를 가르는 길고도 힘든 투쟁에 필수 전력으로 이미 (자의든 타의든) 끼게 된 것 같습니다. 2권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네요. 아무래도 주 독자층을 어린 쪽에 주안을 둔 게 역력하지만, SF 장르 자체에 아직 부담을 느끼는 성인 독자라면 이 쫄깃한 모험담을 자신만의 입문서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공부 잘하는 틴에이저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게, 혹시 너무 재밌어서 이 소설 기반 게임이라도 이후 출시되면 아주 위험할 것 같아서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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