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 머신 - 블록체인과 세상 모든 것의 미래
마이클 케이시.폴 비냐 지음, 유현재.김지연 옮김 / 미래의창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금전과 장부처럼 함께 오래 가야 할 관계가 또 없다." 저자는 21세기 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을 거명하며, 돈처럼 "투명성"을 싫어하는 것도 따로 없으나, 돈만큼 투명성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더 큰 존재도 따로 없다는 취지로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 저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비트코인은 돈이면서 그 돈의 쓰임을 자기 몸에 동시에 기록하는 장부이기도 합니다. 마치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몸에 지저분하게(그러나 필사적으로) 메모를 해 대는 주인공의 분투기인 <메멘토>가 기억 나기도 합니다.

화폐는 가치의 표상일 뿐이고, 금은 같은 귀금속이 아닌 바에야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화폐는 패권을 차지한 제국이 그 지역 일대에서 "구태여 불순물을 안에 섞지 않는다"는 신뢰를 얻은 후 발행의 독점권을 지녀 왔습니다. 그저 대중과 시장의 신뢰를 한번 얻고 끝이 아니라, 그 발행과 유통에는 투명성과 분권화 같은 이념이 구현죌 필요가 있는데, 이를 준수하지 못한 많은 정부들이 얕은 유혹에 넘어가 국민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자신들도 무너지곤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혼자 깨끗하지 못한 이익을 챙기고 잠적한 개인과 세력도 꽤 많을 것입니다.

비트코인이 처음으로 구현한 블록체인 기술은, 여태 많은 이들이 간절하게 바라 오던 몇 가지 혁신을 이뤄 냈습니다. 첫째, 디지털 자산이 흔히 그렇듯 복제가 너무도 쉽기에, 대체 전산 장치로 돈을 찍어 내면 그게 정당한 과정으로 얻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복제품이라면 구태여 내가 지닌 무엇을 건네주고 얻을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나도 집에서 컴퓨터로 만들어 내면 그만입니다. 너도 나도 집에서 돈을 만들어내면 그건 이미 돈도 무엇도 아니죠. 이것을 전문가들은 "결제의 이중성 방지" 이슈라고 부릅니다. 정당하게 만들어진 "화폐"라고 해도, 그걸로 어디에 한 번 결제를 하고는 복제품을 다시 다른 결제에다 쓰는지 아닌지 제재할 수단이 있냐는 뜻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트루스 머신"은, 바로 이 점에 처음으로 착안하여 붙은 어구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비트코인(뿐 아니라 블록체인 기반의 모든 가상화폐들)은 화폐이면서 동시에 장부입니다. 참여하는 사용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모든 이의 지갑(=장부=화폐)에 동시에 기록이 남는 판에 그걸 무슨 수로 일일이 다 조작하겠냐는 겁니다. 조금 회사가 잘나갈라치면, 밖에다 보여 주는 공시 자료(장부의 압축판)를 조작하여 이익을 사취하는 게 아주 못된 습성이지만 근절이 어려웠는데, 이 블록체인 기술을 시작, 기반으로 인류가 진정 최초의 투명성 보장 거래를 자유롭게 이룬다는 생각은 가히 혁신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SF에서처럼 통일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도 대단하고 말이죠.

원리적으로는 그러한데, 현실에서는 여러 문제가 따릅니다. 우선 각자가 넷상에서 다 같은 장부(이지 화폐이자 클라이언트 프로그램)를 돌린다고 했을 때, 속도 문제가 반드시 생깁니다. 강터 신세계점에서 누가 고가의 물품을 사느라 돈(현금)을 치를 때, 예컨대 천원권으로 잔뜩 내놓는다고 해도 그 지연 행위가 저 멀리 신세계 센텀점 누군가의 지불 편의에 손톱만큼도 무슨 영향을 끼칠 리 없습니다. 한국은행에서 한번 찍혀 나가 시중을 도는 중인 지폐야 그 임자의 지갑 말고 어디에다 과부하를 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혹은 상당수)가 다들 비트코인으로 일상에서 결제하게 되면, 마치 p2p 쓸 때에도 queue가 형성되어 기다려야 하듯, 실시간 거래에 부하가 걸리는 게 사실입니다.

이 점이 생각보다 큰 문제라고 하는군요. 블록을 키워서 더 많은 이들이 동시에 접속하게 허용하면, 메모리를 더 많이 점유하게 되고, 채굴 행위에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경우, 일부 재력 있는 이들만 (단기에 손해를 봐 가면서) 채굴에 적극적일 수 있어, 시일이 지나면 50% 장악을 소수의 세력이 위협, 좌우할 수 있는, 그야말로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의 존재 이유가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현재는 이른바 "작업 증명"으로 별개의 비용을 치르게 하여, 채굴로 얻는 이익이 전기요금 등을 간신히 상회하게끔 일종의 속도 방지턱을 마련했기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마저도, 투기 때문에 비트코인의 가격이 시장에서 급상승하기라도 하면 사정이 달라졌지만 말입니다(한국 같은 경우 예컨대 대구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입주할 수 있는 공단에 편법으로 들어간 후 시설을 비트코인 채굴에다 전업시키는 등....). 그렇다고 블록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면, 수수료 비중이 또 높아져서 예컨대 한 잔 5000원 커피에 만원 수수료를 내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고도 하네요. 흔히 "기술적인 문제"가 있다고 할 때에는 사소한 난점이라서 곧 해결된다는 뜻이나, 이런 종류의 기술적 문제는 암호화폐 기반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메모리 크기를 늘리는 쪽으로 간다면, 또 하나 문제가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에 따르는 "하드 포크" 현상의 부작용입니다. 21세기 초에 한국에서 아래아한글 이용자들이 가장 큰 불편을 겪은 게, 워디안 등 최신 버전과 이전 버전이 호환이 안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한컴 쪽에서도 기능의 근본적 개선을 위해 반발과 불편도 다 예상하고 이런 하드포크 결정을 내린 거였습니다만. 만약 비트코인 클라이언트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업그레이드 조치가 내려진다면 꽤 많은 불편이 당연히 예상되죠.

아무튼 이는 암호화폐 분야에 대체로 한정된 이슈이며, 블록체인 기술의 활용 범위는 거의 무제한이라 할 만큼 넓습니다. IoT가 아직 한국에서도 초기 단계인데,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이 보안, 해킹 문제입니다. 샤워나 잡담 등 일상의 화면이 낱낱이 촬영되어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죠. 또 스노든사건 이후 인터넷이 결코 신뢰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불편하게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많은 이들은 인터넷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보안 이슈가 해결 안 된 시스템인데 이처럼 많은 이들이 참여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겠냐는 말을 해 왔었습니다. 헌데 이제 블록체인 원리가 이 정도로까지나 발전을 보았기에, 결제 단말에 과연 해킹 툴이 있는지 없는지, 부정이나 이중 결제가 아닌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하다는 건 분명 큰 혁신입니다.

책에서 또 인상적으로 강조하는 게, 경영학 필수 개념 중 하나인 이른바 "서플라이 체인"입니다. 기업은 고립적인 공장 한 곳만 가동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원료나 중간재를 대어 주는 수많은 다른 업체와의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혹은, 자신이 타 업체에 무엇인가를 공급하는 체인의 일환일 수 있고요). 이 사슬이 길면 길수록 생산의 규모가 크고 품목도 많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문제라도 혹 생기면 그 원인을 추적하기가 몹시 힘들어집니다. 여기서는 치폴레(이 책은 "치포틀레"라고 표기합니다만)의 사례를 드는데, 예전부터 RFID다 뭐다 해서 여러 시스템이 나왔으나 결국 원료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발견하는 데 도움을 못 줘 유망 업체 하나가 망하다시피했죠. 블록체인이 성숙하면 이런 문제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전망입니다.

우리하고는 큰 해당이 없는데, 남미에서는 아직도 부동산 등기 시스템이 불비하다고 합니다. 정부에서 공인하지 않은 필지이고 그 위에 건축된 주택이니,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든가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런 부분은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으므로 큰 실감은 안 나지만, 책에서는 해당 국가 자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런 부동산이 제도권으로 진입만 하면, 경제 성장 10% 역할을 거뜬히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합니다(어디까지나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정도고요). 한국에서도 동반 성장 이슈 관련하여 이 포용적 금융 정책을 거론하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큰 적실성은 없습니다. 남미 같은 데서는 등기부의 진정성이 큰 문제가 되므로, 행여 관련 공무원이 원시 조작을 시도하여 부정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데 블록 체인이 그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앞에서 "한국의 경우 등기 시스템이 워낙 완비되어 있어..."라고 했지만, 변화무쌍한 세상에 더군다나 전산화된 Db에 누가 들어가 어떤 조작이 가능할지야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블록체인은 개인의 신원 증명 등에 결정적인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데, 우리도 흔히 안구, 지문 등 신체 정보가 한번 털리기라도 하면 완전 답이 없는 상황으로 빠지리라는 걱정을 하죠. 여기에 대해서도 이 기술이 보안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블록체인은 애초부터 정부 없이, 중간자의 갉아 먹는 비용 없이, 모든 개인이 민주적으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경제적 활동을 벌일 자유를 보장한다는 취지로 개발된 건데, 심지어 이 기술은 문학이나 예술 창작 활동의 표절 방지, 불법 카피 유통, 출판사나 서점 유통 라인의 도움 없이 대중에게 자발적으로 호응과 후원을 얻어 창작자를 경제적으로 돕는 단계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혁신이란 참으로 한계가 없는 인간 정신의 대 도약임을 실감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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