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2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권에는 순자, 백이삭, 또 그의 부모(백이삭의 장인 장모) 등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졌더랬고, 이 2권에선 순자가 원래 배었던(?) 아기, 그 후에 백이삭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기, 그들이 장성해서 낳은 아이들이 커서 벌어지는 굴곡 많은 사연이 길게 이어집니다.

여러 대(代)의 굵직한 희비극이 교차하는 장편을 읽다 보면 핏줄의 기질과 업보가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구나 같은 감회에 마음이 숙연해질 때가 많습니다. 대체로 이런 소설들은 전대(前代) 인물들이 뒤로 갈수록 비중이 급격히 적어지거나 아예 자취도 없이 퇴장하는 수가 많아서 아쉬웠는데, 이민진 변호사의 이 작품은 1권의 주요 인물들이 2궝에서도 계속 얼굴을 비추며 일관된 주제를 부각하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백이삭은 1권에서 폐결핵을 앓았기에 얼마 못 살리라는 예상을 (작품 속의 인물들이든, 작품 밖의 우리 독자들이든) 다들 할 수 있었죠. 이 2권에서는 폐결핵이 아니라 그 외 다른 중병들(후유증이나 합병증일 수 있죠)을 계속 앓다가 중반부쯤에 가서 죽고 맙니다. 백이삭과 순자네 집은 가뜩이나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고 그 형 요셉네도 마찬가지였는데, 맏아들 노아는 공부를 꽤 잘 하는 아이였고 조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력만으로 와세다 대 입학 자격을 따 냅니다. 이 집안에서야 당연 경사로 여길 만했습니다. 노아의 백부 요셉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한수에게 찾아가 후원을 부탁하려는 집안 의견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파친코를 운영하는 고로 사장의 호의를 구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갑니다. 지금이야 첫손을 다투는 명문이지만 와세다 대학은 사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인 학생이 입학금이나 기타 기여를 할 재력 있는 집안 출신이면 넉넉히 받아 주었습니다(그래서 나이 좀 드신 분들은 와세다[조도전] 대학 알기를 좀 우습게 압니다). p111에서 "그토록 위대하고 전설적인" 같은 평판은 좀 과장된 면도 있습니다.

고로 사장은 그 앞에서 잠시 나왔었죠. 노아의 이부 동생인 모자수는 자기 형(이부형인지는 물론 몰랐겠으나)이 갓 대학에 입학할 무렵 벌써 사회에 한 발을 디뎌 돈깨나 버는 어린 매니저 노릇을 하고 다닙니다. 형이 공부에 대단한 적성을 지닌 것과 대조적으로, 동생은 뭘 외운다든가 계산을 꼼꼼히 해 내는 일과는 아주 담을 쌓았습니다. 그렇다고 바보냐 하면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머리가 잘 돌아가며 구변이 매우 좋습니다. 옷도 잘 입고 덩치도 크고 힘도 꽤 쓰며 잘생긴 편이라 여성들에게 인기도 얻는 편이죠.

이 모자수를 고로 사장이 꽤 잘 본 겁니다. 고로 사장의 모친이 제주도 해녀 출신이라는 건 이 2권 전반부에서 암시됩니다. 그렇다고 반쯤 같은 조선인 혈통 때문에 모자수에게 끌렸냐 하면, 고로 사장은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세상사 이치에 훤하고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자수가 풍기는 활력과 총기를 알아보고 이런 애를 종업원으로 매장에서 굴려야 장사가 잘 된다는 확신이 유일한 동기였을 뿐입니다. 녀석이 똑똑했기에 유리한 조건으로 써 준 것이지, 무슨 핍박 받는 조선인 처지가 불쌍했더거나 동병상련의 심경 같은 한가한 소리는 이 사람 앞에 씨알도 먹힐 리 없습니다. 1권에서 너무도 암담하고 절망적이며, 그 와중에서도 사람만 좋은 이들이 대거 등장해서 독자의 마음이 좀 어두워질만 했다면, 2권은 활력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일찌감치 성공적으로 도입한 일본 땅에서 악착 같은 몸부림으로 살아남고 적응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소설의 재미를 더합니다.

앞서 말했듯 모자수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고로 사장에게 고용된 것도 지아키라는 처녀(예쁘긴 하나 지나치게 남자들에게 꼬리를 치고 다니는, 그렇다고 딱히 처신이 아주 값싼 것도 아닌)를 돕다가 (가뜩이나 조선인이라고 차별 받고 감시의 대상이 되는 판에) 경찰 손에 입견될 뻔한 걸 그가 관여해 구해 준(지역 유지였으므로) 사건을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고로 사장의 매장에서도 모자수는 단연 여직원들에게 주목 받았는데, 모자수가 고른 건 유미라는 직원이었고, 둘이 잘 어울린다며 사장의 축복까지 받습니다. 안타깝게도 유미는 2권 중반부에서 (이 매력적인 여성에 대해 좀 길게 이야기가 이어질 줄 기대했으나) 교통사고로 죽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주 건강하고 영민한 아들 솔로몬은 혼자 살아남습니다. 미국 크로니클 타입 대중 소설에서 사실 자주 봐 오던 전개이고 다만 인물과 배경이 한국, 일본 등으로 바뀌어서 이색적으로 다가왔을 뿐 어딘가 좀 익숙한 진행이긴 합니다.

모자수의 이부 형 노아는 와세다 대학에 드디어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우리 독자들은 다 알지만 사업가 고한수가 저 순자를 현지처 삼아 희롱하다 낳은 아이죠. 학교에서 그는 오만하고 리버럴 기질 가득한 아키코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집니다. 아키코는 사실 학교에서도 제멋대로의 기질 때문에 교수에게 찍혔던 판인데, 앞으로 교수에게 잘 보여 학계 진출을 은근 염두에 두는 노아로서는 이런 학생을 가까이해서 유리할 게 없었습니다(정치적 고려). 출신 성분상 노아 같은 조선인에 친근감이나 연정을 느낄 이유가 없는 아키코의 화통한 처신에 반해, 노아는 장래 생각도 그만 놓아 버렸던 거죠. 이 과정을 한 챕터 정도로 처리하는데 조금 빠르다는 느낌도 들지만 역시 유사 장르에서 익히 보던 패턴입니다.

노아는 어느날 아키코에게, "난 니가 나쁜 조선인이 아니고 좋은 조선인이라 생각하며, 이런 멋진 조선인을 우리 엄마아빠에게 보여 줄 수 있어서 행운인 듯해."란 말, 또 "고한수란 사람은 사실 니 아빠 아냐? 너무 닮았던데. 그리고 우리 아빠도 못 버는 그런 엄청난 수입을 어떻게 올리니? 야쿠자겠지 아마." 란 말을 듣고 바로 그녀와 헤어집니다. "니네 생각대로, 우리 조선인들은 이처럼 한순간에 돌변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그 다음 서술이 충격적인데, "나쁜 조선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나쁜 조선인으로 본다는 말이나 같은 뜻으로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노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역시 똑똑하죠. 노아가 또 충격을 받은 건, 그전까지만 해도 고한수 사장이 왜 자신을 돕는지 깊이 생각 않고 넘어갔는데, 아키코 말을 들으니 그제서야 진상이 확 납득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날 즉시 어머니인 순자씨에게 모든 걸 추궁하고, 고 사장의 진짜 직업이야 순자씨 본인도 모르니 뭘 확인해 줄 것도 없었겠으나 여튼 노아는 학업이고 뭐고 모든 걸 때려치우고 종적을 감춥니다.

고로 사장은 나이도 좀 젊은 편인데 유독 순자 아주머니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그 아들인 모자수에게도 잘 대해 줍니다. "모자수"는 영어 Moses를 일본어로 읽은 것이며, 한국 이름은 백모세입니다. 예전 1980년대 중반에 200m 육상 스타였던 에드윈 모지스 때문에라도 익숙해진 이름이죠. "보쿠(白)" 같은 일본식 독음이나, "반도" 등 재일교포들의 창씨 성을 접할 때마다 우리 독자들의 마음이 짠해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 초반부에 위안부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고, 한국전쟁은 그리 깊이 안 다뤄지며 "싸움이 나는 통에 (고향인) 부산 영도에 가 볼 수도 없다"는 정도로 언급되는 정도입니다.

영국계 청교도나 네덜란드계 신교도가 초기에 이민 와 시스템을 발전시킨 미국에서, 예컨대 아일랜드계니 그보다 훨씬 뒤의 이탈리아계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았습니까. 게으르다, 성질이 급하고 감정적이다, 폭력적이다, 등등.... 이런 편견 패턴이 일인들이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대한 태도에도 그대로 전이되어, 예컨대 이런 소설에서 인물들의 입을 통해 표현, 재현돠는 건데.... 문학 작품(혹은 영화)를 통한 전염일 수도 있고, 근대화 과정에서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하는 행태를 보고 일인들이 그대로 따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파친코는 첫째 모자수가 고로 사장의 매장에 취업한 도박장이기도 하고, 확률을 기막히게 조정하여 손님들로부터 최대 이익을 뽑아내는 고로 사장의 수완이 화려하게 꽃피는 상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모자수의 이부 형인 노아가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한 곳이 바로 어느 파친코의 경리직이었기에, 이 기묘한 생을 살아가는 두 형제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주친 산업의 교차점이기도 하죠.

사실 이 소설에서 무작정 일본인들이 악마로 그려지진 않습니다. 집단으로서 다가오는 일본인은 한없이 잔혹하고 비이성적인데, 개개인은 인간적이고 푸근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많은 듯 묘사됩니다. 반면 조선인 역시, 우리 동포이고 같은 상처를 안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이해와 지지를 얻고 들어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성품부터가 한없이 비뚤어졌거나 거친 본색입니다. 개개인의 선의/악의와 무관하게, 큰 틀에서 사람 운명을 갈라놓는 건 그래도 역사의 모순과 체제의 의도입니다. 차별과 억압의 기제가 얼마나 많은 개인과 가정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성실한 개인들은 또 어떤 식으로 치열하게 이런 시련을 극복해 가는지 이 장편은 잘 그려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5권 정도 분량으로 이야기를 더 상세히 늘렸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모자수와 노아 두 형제 이야기만으로도 두 권치 사연이 충분히 나올 듯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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